울타리를 넘어서

여행의 유혹

파샤 (pacha) 2014. 6. 30. 08:02

고속전철 안에서 노선도를 흘끔 보는데 빌파리지(Villeparisis)라는 지명이 눈에 언뜻 들어온다. 여러 역 가운데 뜬금없이 이 지명에 눈길이 가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프루스트 작품에 나온 인물의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님 파리의 옛 이름을 달고 있어서였을까. 빌파리지, 빌파리지, 파리지, 파리지, 파리... 아 참, 발자크가 투르에서 올라와서 한때 살던데지...


고속도로 달릴 때 나를 가장 유혹하는 것은 바로 도로표지판 가지런히 적힌 지명들이다. 지금 타는 고속도로를 내처 달리면 갈 수 있는 도시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위에서 아래로 가까운 도시에서 먼 도시 순서로. 그런 지명을 보는 순간 야릇한 흥분을 느낀다. 계획한 거도 갈 거도 아니지만 그냥 도시 이름만 봐도 이상야릇한 취기가 오른다. 이미 가본 곳이면 추억이 묻어나오고, 가지 않은 곳이면 상상이 발동된다. 그저 지명만 보아도 벌써 머리와 몸이 달아오른다. 저 수많은 지방들... 글자에서 황홀한 사이렌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곳은 가본 데, 저곳은 가보진 않아도 아는 데, 저긴 처음 보는 곳...


그렇다고 난 빌파리지에 가본 적도 없고 어떤 곳인지도 전혀 모른다. 어떻게 이 지명에 이끌리게 되었나? 막연한 연상작용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네 감성은 늘 이성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어서 때로 아무런 연관관계 없이도 생각의 꼬리는 길게 펼쳐진다.


자주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옛일을 떠올리곤한다. 청각을 타고 들어오는 기억은 거의 생리적이어서 그 반응은 정말 강력하다. 그 음악듣던 시절이 거짓말 같이 되살아온다. 덩달아 음악에 얽인 일이며 인물들이 줄줄이 엮여나온다. Those were the days, Yesterday, All those years ago, Yesterday once more...


뮤직 비디오와 함께 음악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같은 노래의 여러 버전을 보다 보면 연령대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새파랗게 젊은 이얀 길런이 탄력넘치는 몸매에 폼나게 입고, 모자쓰고 바람잡는 로저 글로버 옆에서 표효하는 모습을 보다가 하얀 머리의 칠십대가 된 이얀 길런이 여전히 로저 글로브 옆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친다. 어떤 때는 노란 티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어떤 때는 가죽옷을 입고, 어떤 때는 하얀 정장차림으로 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던 이얀 길런. 전설적인 키보드주자 존 로드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 깐깐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리치 블랙모어는 디퍼플을 떠나 레인보우로 간 지 오래다. 그 호리호리하며 날카로운 영원한 반항아 리치 블랙모어도 칠십이 가까와지며 둥글넓적해진다. 전설적인 디퍼플의 라인업은 뭐니뭐니해도 리치 블랙모어가 있어야 제격! 다른 단원보다 비교적 젊은 리더기타 스티브 모스는 뭔지 모르게 어색하다. 이얀 페이스는 웃통을 벌거벗고 신들린듯 드럼을 두드린다. 존 로드는 몇 대의 키보드를 오가며 환상의 멜로디를 이끈다. 로저 글로버는 으레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베이스 기타를 퉁기며 흥겹게 무대를 누빈다. 리치 블랙모어는 까만 옷을 입고 언제나 무표정하게 제자리에 박힌 채 리더기타를 친다. 이얀 길런은 둥둥해지고 얼굴선이 맛이 가도 여전히 근육질을 자랑하며 약간 느린 템포로 노래한다.


가수의 성량과 힘이 줄어든 대신 엠프 기능이 눈에 띄게 나아져 밴드의 사운드는 오히려 더 웅장하고 강력해졌다. 사운드가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졌지만 한창 때의 팽팽한 긴장감과 섬세한 맛은 떨어진다. Child in time, Perfect stranger, Strange kind of woman, Highway star, Speed king, Woman from Tokyo...


대학시절 [신한다방]에서 J와 둘이서 누구의 신청곡이 먼저 나오나 내기할 때 단골메뉴 가운데 비틀즈는 물론이고 디퍼플, 레인보우, 핑크 플로이드, 산타나 등의 곡이 꼭 들어있었다 : Soldier of fortune, Smoke on the water, Catch the rainbow, Rainbow eyes, Time, Money, Europa, Samba p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