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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Van Gogh : 1853-1890)

파샤 (pacha) 2015. 11. 29. 20:55

수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의 작품에 감동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작가 생활이래야 단 십 년, 게다가 우리가 아는 걸작품을 생산한 것은 프랑스 체류 4년 정도에 그린 그림들이다. 살았을 때 팔린 작품은 단 한 점! 죽어서는 어느 누구보다 추앙받는 화가!! 저주받은 예술가의 전형인가.

어떻게 보면 삶과 작품 또 테크닉의 일치가 아닐까. 정열을 불태운 극적인 삶이 들끓어오르는 에너지로 화폭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반 고흐는 특유의 원색의 강렬한 색채를 회오리로 요동치는 터치로 정열을 뿜어낸다.


반고흐와 마찬가지로 서른 일곱에 죽은 유명한 화가는 라파엘로와 앙투안 바토 그리고 툴루즈 로트렉이다. 쇠라가 32세, 제리코는 예수와 같은 서른 셋에 죽는다. 카라바조는 39세.


[자화상], 1889.

마흔 점에 이르는 자화상 가운데 마지막에 해당하고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이다. 생레미 요양원 시절의 작품. 자신의 편지를 보면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의 정신상태를 극복하려고 했다.

수척한 용모에 퀭한 눈, 텁수룩한 수염, 찡그린 표정. 이 모든 것들이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보이게 한다. 현재 자신의 정신상태를 되돌아보려는 촛점 흐린 시선이 무엇보다 보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산란한 심리를 드러내듯 배경이 온통 회오리가 이는 듯한 무늬로 장식된다.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표현하려 했을까.

붉은 머리와 수염을 제외하면 거의 터키옥색 하나로 이렇게 멋진 화폭을 구성한다.




[오베르의 성당], 1890.

오베르 쉬르 오아즈(Auvers-sur-Oise)에 가면 그림 속의 성당은 그대로 있다. 그림에 나오는 성당이 실제의 성당보다 훨씬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성당 앞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밀밭과 공동묘지가 나온다. 12세기의 고딕성당인 노트르담은 형체가 뒤틀리면서 해체될 것 같다. 푸른 하늘에는 회오리 바람이 일고 풀과 꽃 나무들은 심하게 일렁인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취하면서 하늘 끝까지 뻗은 종탑이며 몸체가 격랑에 시달리는 거대한 배처럼 보인다. 내리쬐는 강렬한 여름 햇빛에 작가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이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작가의 심경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가쉐 의사의 초상], 1890.

"의사 가쉐의 얼굴을 햇살에 그을리고 달궈진 벽돌 색으로 칠했다. 이렇게 해서 얼굴이 더욱 창백해 보이고 우리 시대의 비통한 표정을 엿보이게 했다." 의사 가쉐는 베레를 쓴 얼굴을 한 손으로 받치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붉은 머리에 군청색 옷을 입고 시선은 멍하니 정신나간 사람처럼 우울해 보인다. 아주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 가쉐는 분명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염소에 줄을 매어 오베르 마을을산책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미술과 의학에 대한 취미를 동시에 가졌고 끝까지 미술 애호가로 남는다. 릴(Lille) 출신의 가쉐는 20세에 파리에 올라와 의학을 공부한다. 파리에서 동향의 화가 아르망 고티에(Armand Gautier)를 만나 1850년대에 보헤미안적 삶을 체험하고 사실주의 동아리(Champfleury, Courbet, Proudhon...)에 참가한다. 1858년에 몽플리에에서 멜랑콜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의학 공부를 마친다. 이 해에 쿠르베 수집가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를 만나 미술품 수집에 영감과 열의를 받는다. 같은 해에 세잔의 아버지를 만나기도 한다. 1859년에 파리에 돌아온 가쉐는 의사 개업을 한다. 일반의학을 전공했지만 신경쇠약쪽으로 전공을 바꾼다. 그가 진료를 한 환자는 André Gill, 판화가 Charles Méryon, Juliette Drouet, 피사로의 어머니, 자기 자신과 부인 그리고 환자들의 자식들이다. 1868년 Blanche Elisa Castets와 결혼, 이듬해 맏딸 마그리트 그후 아들 폴이 태어난다. 1870년 보불전쟁 뒤 아내가 결핵병을 앓자 파리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한다. 퐁투아즈에 정착해 있던 피사로의 권유로 1872년 오베르로 이사한다. 세잔은 의사 가쉐의 집을 소재로 두 점을 남긴다. 반 고흐도 의사 가쉐의 딸이 정원을 거니는 모습을 화폭으로 옮긴다(오르세 박물관 소장). 오베르는 가쉐가 정착하기 전에 도비니가 살았고 도미에도 머잖은 곳에 정착하고 있었지만 의사 가쉐가 오고부터 화가의 마을로 변모한다. 

가쉐는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개조하고 화가들을 초청한다. 화가들의 작업에 열광하며 작품을 사들이기도 한다. 활동적이고 친절하며 다정한 성격인 가쉐는 붉은 머리에 키가 작달막했다. 앙상한 얼굴에 황제턱수염을 기른 가쉐 의사를 머리 색깔 때문에 "사프란 의사"라고 불렀다. 모든 화가들이 즐거이 가쉐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 덕택에 가쉐의 수집품도 점점 늘어났다. 가쉐는 분명 괴짜였다. 프리메이슨 단원에 다윈주의자며 반카톨릭주의자 그리고 공화파였다. 미술과 문학을 토론하는 절충주의자 협회 회원이기도 했다.


의사 가쉐는 틈날 때면 그림도 그리고 판화도 제작하던 아마추어 예술가다. 그렇지만 이렇다할 재능은 없었지만 친구 화가들 덕에 유명해졌다. 19세기 후반 의사 가쉐와 친분을 맺지 않은 화가들이 드물다. 피사로, 르누아르, 기요맹, 모네, 마네... 특히 초기 시절(1873)의 세잔의 친구였고 말기(1890)의 반 고흐의 친구였다. 특히 반 고흐가 권총 자살을 시도하고 침상에 누워 사경을 해맬 때 먼저 크로키를 하고 치료를 했다. 

1872년 겨울 서른 셋이던 세잔은 부인이 될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uet)와 아들을 데리고 오베르에 도착한다. 세잔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모색하던 시절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을 비롯 마을 풍경, 정물화, 꽃다발 등을 그린다. 살롱전에 낙선하여 낙담한 세잔한테 가쉐는 찬양자이자 수집가가 된다. 이 둘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다. 어느 날 가쉐가 세잔한테 마네의 [올랭피아] 얘기를 꺼내자 자존심이 상한 세잔은 "하찮은 작품"하고 대꾸하고 자기식으로 [현대판 올랭피아]를 그린다. 1874년 가쉐가 [현대판 올랭피아]와 [목매달아 죽은 사람의 집]을 대여하여 제1회 인상파전에 전시한다.세잔은 일 년 넘게 오베르에 머무는데 기요맹(Guillaumin)이 세잔을 만나러 오베르에 자주 들른다. 세잔과 기요맹은 가쉐의 다락방 아틀리에에서 피사로를 만난다. 세잔은 오베르에서 서른 점 가까이 그림을 그리는데 가쉐의 소장품이 된다.

반 고흐는 1890년 5월 오베르에 오면서 가쉐를 만난다. 빈센트는 "가쉐한테 진정한 친구 새로 얻은 형제 같은 느낌을 받아."하고 동생 테오한테 보낸 편지에서 밝힌다. 둘의 만남은 아주 짧았다. 1890년 7월 27일 빈센트가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빈센트는 테오한테 보낸 다른 편지에서 가쉐를 이렇게 묘사한다. "가쉐는 아주 괴짜야. 내가 보기엔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어."

 

정신과 의사지만 아마추어 화가기도 한 가쉐는 오베르에 정착한 화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한다. 궁핍한 화가한테는 진료비를 작품으로 대신 받곤했다. 오베르에서 반 고흐는 가쉐의 후원으로 그런대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었다. 1909년 여든 살에 가쉐가 죽었을 때 반 고흐의 작품들을 비롯해 피사로 12점, 서른 점이 넘는 기요맹, 서른 점의 세잔 작품을 소장하였다. 가쉐 의사의 초상은 다른 버전이 하나 더 있다. 가끔 둘 중 하나는 위작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다른 버전은 현재 개인 소장으로 정확한 소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반 고흐의 방], 1889.

아를의 자신의 방을 그린 그림은 모두 세 점인데 오르세에 소장된 것은 세 번째 작품이다. 친구 고갱을 맞이하는 부푼 기대를 드러내는 걸까. 방 안의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 놓인 사물들은 불안정해 보이고 금세 둥둥 떠다닐 것 같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원근법 원칙에 따른다면 서툴게 적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장미와 아네모네], 1890.

약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촛점을 취한다. 화폭을 뒤덮는 물감의 두께를 보라. 작가의 격렬한 심경이 그대로 엿보인다.


[아를르의 여인], 1888.

분명 반 고흐의 작품에서 노란색이 주조를 이룬다. 이글대는 정열을 표현할 때 노란색을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배경색 처리에서 물감의 두께를 보라.


아를에서 처음 사귄 친구로 벨기에 출신의 시인이며 화가인 외젠 보쉬의 초상. 단순한 보색 대비가 볼 만하다.


[아를의 무도회장].


[이탈리아 여인]

일본 판화의 영향이 바로 느껴진다.


[론강의 밤풍경]. 

강가를 산책하는 두 남녀가 이색적이다. 측백나무가 하늘 향해 치솟고 소용돌이치는 별빛을 그린 다른 작품은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the Museum of Modern Art)에 소장되어 있다.


[의사 가쉐의 정원을 거니는 가쉐의 딸 마그리트]

화폭이 돌출할 정도의 물감의 두께를 보라.


[의사 가쉐의 정원의 편백나무]


[낮잠], 1889-1890.

밀레의 그림에서 소재를 따온다. 노랑과 파랑의 보색 대비가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