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박물관

쿠르베(Gustave Courbet : 1819-1877)

파샤 (pacha) 2015. 11. 30. 21:49

[오르낭의 매장], 1849. 

쿠르베 나이 서른 살인 1849년 여름에 착수, 1851년 살롱에 출품.

완성된 다음 오르낭을 비롯 그르노블에 전시한다. 뒤이어 디종에 전시하지만 앞의 두 전시와 달리 실패를 거둔다. 파리의 살롱전에 출품해서는 더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1881년 유산으로 물려받은 쥘리에트가 공매를 하고 1882년 루브르 소장이 된다. 

빨래를 늘던 다락방에서 제작해서인지 인물들은 저부조처럼 느껴지고 단체 초상화의 갤러리 같다. 46명의 오르낭의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실존 인물들과 닮은 나머지 그린 지 50년이 지난 다음에도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쿠르베는 파리 코뮌 때 예술적 가치도 없고 전쟁심리만 유발시키며 반공화국적이라고 방돔 광장의 탑을 허무는데 적극 참여한다. 그 이후 반정부가 들어섰을 때 6개월 옥살이를 살고 엄청나게 빚을 지자 스위스로 망명간다.

 

단체 초상화이면서 풍속화.

엄밀하게 말해 프랑스에서 풍속화나 풍경화가 제 자리를 잡은 것은 19세기 중반에 와서의 일이다. 고전주의 전통이 워낙 세어서 낭만주의의 꽃이 가장 뒤늦게 핀다. 17세기에 이미 풍경화, 풍속화가 발전한 네덜란드쪽과 아주 대조적이다. 이것은 정치 종교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유롭고 진취적인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들이 실내장식을 위해 풍속화나 풍경화를 주문하면서 풍경화 풍속화가 일찍 유행한다. 반면 보수적인 카톨릭 종교가 지배한 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냐쪽은 여전히 종교화나 역사화가 주를 이룬다.

 

단체 초상화라면 이미 17세기에 네덜란드쪽에서 유행한다. 같은 직종의 사람들이 갹출하여 그림을 주문하던 것이다. 돈을 많이 낸 사람은 가운데 번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덜 낸 사람은 가장자리에 자리잡는다. 네덜란드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큰 역할을 한 민병대를 소재로 그린 렘브란트의 [야경 순찰대], 반 데르 헬스트의 [비커 대장의 연회], 프란츠 할스의 [야윈 부대]를 떠올려 봄직하다. [오르낭의 매장]은 네덜란드의 단체 초상화에서 큰 영향을 받은 듯하다. 1847년 쿠르베는 네덜란드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던 민병대원들이 화려한 복장으로 단체 초상화를 그려 사무실을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네덜란드의 역사화는 바로 이런 단체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쿠르베가 참조하는 것은 조잡한 민중 판화와 민속 달력이나 민담이다.

그러니 [오르낭의 매장]은 신화나 유명한 전투,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화"시켜 그리던 지배계층의 미덕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역사화에 전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그야말로 혁신적인 작품이 된다. [오르낭의 매장]에서 인물들 배치는 그야말로 평등하다. 일직선으로 나란히 배열한다. 가운데 자리와 가장자리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계층화되고 서열화시키지 않는다. 결과 "예술의 민주화"를 구현한다. 신부, 시동, 성가대원, 운구하는 사람, 무덤 구덩이 파는 일꾼, 치안판사, 시장, 공화파, 쿠르베의 가족들과 곡하는 여인들 모두 같은 무게 중심으로 단체 사진에 포즈를 취한다.

한쪽은 성직자, 다른 한쪽은 유지가 서로 마주하고 자리잡는다. 오르낭의 시장과 치안 판사(프루동 사촌)는 프리메이슨 단원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넓적다리뼈와 해골은 프리메이슨 단원의 입문식에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세속적인 죽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오르낭에 누군가 죽어 장례식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죽은 이는 유명한 사람도 유지도 아니다. 그저 저런 평범한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매장을 계기로 직업이나 신분이 서로 다르지만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다. 우리네 인생의 일상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장례식이다. 당시에 서민들의 일상을 소재로 삼은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다. 게다가 풍속화를 역사화처럼 큰 판형으로 그린다. 민중 미술(민속을 나타내는 판화)을 반영하여 당대 부르주아 계층이 보기에는 추하고 속되며 비천하고 자질구레한 지방의 장례장면에 평범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점은 가히 혁명적이다.

 

 

[화가의 아뜰리에, 현실의 알레고리, 7년 동안의 정신적이고 미학적인 고찰], 1855.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고 칠 년 뒤 야심적으로 그려낸 역작. 1881년 공매 가격 2100F, 1919년 루브르 매입 가격 900 000F.

장소는 파리의 쿠르베 아틀리에.

각 인물들은 상징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양쪽이 짝을 이룬다. 왼쪽은 사회에 암적인 존재들의 모임이고 오른쪽은 쿠르베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다(Hélène Toussaint의 해석). 헬렌 투쌩은 각 인물 유형에서 실제 인물을 빗댄 원형을 찾아낸다. 

베르너 호프만(Werner Hofmann, L'Atelier de Courbet, Macula, 2018)은 막스의 변증법적이고 예술가의 사회참여적인 면으로 해석해낸다. 특히 호프만은 이 작품이 중세의 종교제단화의 3매화 형식을 띤다고 주장한다. 가운데가 하느님 같은 존재로서 어느쪽에도 빌붙지 않고 독자적인 작업을 하는 예술가를 위치시키고, 왼쪽은 자본의 이득을 보고 남을 이용하는 인물상들을 집어 넣고 오른쪽은 부르주아 계층의 인물들을 배치시킨다. 호프만의 생각인즉 아이 둘과 오른쪽 여자 모델만 자신의 창조적인 예술 행위에 관심을 보이는 존재들이라고 본다.

 

쿠르베는 주문작을 그리지 않으며 팔릴 그림을 제작하지도 않는다고 밝힌다. 

판관 자세로 가운데 턱하니 자리잡고 고향 지방의 풍경을 그리는 쿠르베를 보라. 자존심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쿠르베다. 아이와 고양이는 판단력이 없는 중성적인 존재다. 오른쪽 여자모델은 사실주의 시대의 새모델이다.

화면 맨 왼쪽에 돈통을 들고 있는 사람은 탐욕의 상징 유태인, 그 바로 오른쪽은 보수적인 신부를 나타낸다. 의자에 앉아 사냥개를 데리고 있는 인물은 나폴레옹3세를 빗댄 밀렵꾼이다. 천 자락을 들고 상대편을 마주한 인물은 유럽을 상대로 협상하는 장삿꾼이다. 길쭉한 모자에 검은 양복차림의 푸둥푸둥한 인물은 저가 신문을 보급해 돈을 많이 번 부르주아의 상징 베르탱 씨로 장의사로 분장시켜 놓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자세를 잡은 뚱뚱한 여인은 가난의 대명사 아일랜드 여자다.

맨 오른쪽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 이는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다. 보들레르 바로 왼쪽 벽면에 그림자처럼 보이는 인물은 보들레르의 정부 마리 도르발(Marie Dorval)을 그렸는데 보들레르의 요청으로 지운 흔적만 남아 있다. 그 왼쪽에 둘 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는 남프랑스 출신의 화상 브뤼야스(Bruyas) 부처다. 의자에 앉은 사람은 사실주의의 이론적 틀을 제공한 소설가 샹플뢰리다.

 

[가죽 허리띠에 손을 댄 자화상], 1845-1846.

[목욕하는 여자], 1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