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를 넘어서

"니 죽고 나 살자!"

파샤 (pacha) 2018. 2. 25. 03:30

한 삼 년 쯤 내가 도맡아 진행해 온 "핵심투어"가 어제로 막을 내렸다. 여행사도 가이드도 경쟁업체와 경쟁이 되지 않아서이다. 이 여행사 사장님은 "속이 쓰리지만 그만 둡시다."로 가닥을 잡았다. 여행상품 판매에서 가격경쟁을 하면 버텨낼 장사는 아무도 없다. 소비자 특히 한국 소비자는 조금이라도 싼 쪽으로 몰려들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가격 비교하기 쉬운데 누가 비싼 상품을 찾겠는가.

 

가령 내가 진행하던 핵심투어 비용이 한 사람 당 50유로인데 다른 업체들은 거의 35유로였다. 게다가 선심성 시간공세! 핵심투어 시간이 2시30분인데 다른 업체들은 거의 다 3시간이다. 어떤 업체는 4시간 투어를 내걸고 한다. 또 어떤 업체는 25유로에 투어를 진행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 몽생미쉘 투어에 참가하면 덤으로 해주기까지 한다. 투어의 질을 따지기 전에 겉보기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시간은 짧은데 비용은 더 비싸! 무슨 합법 여행사고 공인 가이드,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다. 댓글을 달아주면 손님한테 만 원을 제공한다고... 유투브에서 클릭 횟수가 인기 가수를 판가름 하듯 권위있는 여행사 사이트에서 댓글 갯수로 가이드 자질을 측정하는 시대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올라오는 댓글이란 손님 스스로 쓴 게 분명 많겠지만 동원된 댓글도 상당수라는 말이다. 한때 나도 투어가 끝난 다음 조심스럽게 댓글 좀 부탁한다는 말을 어줍잖게 몇 차례 꺼내었다. 물론 손님 분위기가 좋고 가능성이 있어 보일 때였다. 딱 잘라 말해 부탁한 효과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어떤 손님은 자진해서 달아주겠노라고 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 손님의 댓글은 실제 올라오지 않았다. 그 이후 절대 댓글 얘기는 아예 꺼내지 않았다. 내 자신이 너무 우습다는 자괘감이 들어서다. 물론 부탁하지 않았어도 한국 돌아가서 댓글을 써준 손님들은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투어가 끝난 뒤 바로 설명 잘 들었다는 인사를 듣기도 하고, 카톡으로 고맙다는 인사말도 몇 차례 받았다. 물론 가이드에 대한 불평이 여행사의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전달되기도 했다. 박물관 설명만 하는데도 한 번은 가이드 교체까지 당했다. 손님이 왕이니까! 

 

한 손님이 엇비슷한 가이드 투어를 받고 가이드의 자질을 비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보통 한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물론 패키지를 통해 여러 번 와 본 손님이 전문투어를 참가하고 비교하는 경우는 몇 번 보았다. 개인적으로 패키지 단체 설명을 하다가 몇 년 전에 선생님 설명을 들었어요, 가이드를 받았어요 하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여행을 자주 오는 사람은 한 해에 두 번 와서 나한테 아는 척한 사람도 있었다. 손님이야 자기 가이드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만족하면 그만이다. 그래야 서로 좋지 않겠는가. 적어도 박물관에 관해서는 가이드가 손님보다 정보나 지식이 우위에 서 있는 게 사실이니까. 손님을 얕잡아 보아야 한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작품 설명을 흥미롭게 술술 풀어내고 좋은 설명을 만들려고 가이드는 늘 노력한다. 

 

경쟁업체의 가이드는 분명 내가 받은 비용보다 헐값이기 쉽다. 그것은 투어비용을 따져보면 쉽게 계산서가 나온다. 저가 상품이 가능하려면 현장에서 뛰는 가이드 수입이 적거나 손님이 아주 많거나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여행사도 남길 수 있다. 자본주의 최첨단을 걷는 여행업의 무제한 가격경쟁은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모른다. 얼핏 손님들은 그 덕을 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은 서비스 질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동남아 여행에서 가이드가 손님을 사가서 쇼핑을 통해 이득을 챙겨야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유럽 패키지도 일반 개인 항공료보다 더 싼 상품가격을 내놓은 지 오래다. 마침내 박물관 전문투어마저 그 길을 뒤좇아 가기 시작했다. 손님을 많이 모으기 위해 극약처방으로 가격을 마구 후려친다. 남이야 어찌 되건 나만 살면 그만?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경쟁업체한테 밀려날 줄 모르나? 여행사의 경우 인터넷 사이트에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모객하는 경우 현지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다. 자유시장 경쟁체제에서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 여행사 가이드의 경우 직원으로 일정액의 월급을 받거나 월급에 인센티브로 알파를 더 받는데 보나마나 턱없이 적은 액수다. 가이드 개인이 온라인 여행사 사이트에 등록해 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보다 가격을 낮춰 더 많은 손님을 확보하고 댓글 공세를 통해 훌륭한 가이드로 등극한다. 물론 이 경우 여행사에 커미션만 내면 나머지는 온전히 가이드 개인 수입이라 역시 나처럼 정식 여행사를 끼고 일하는 것보다 훨씬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여기에 최저가 상품의 비결이 있다.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최저임금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여행상품 가격에도 공정 최저가격이 꼭 필요하지 않을까. 우버식 경영에는 현장에서 뛰는 노동자에 대한 고려는 한 치도 없다. 노동 조건과 대우는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새로운 일 자리와 이윤이 생길 것이라는 환상만 심어줄 뿐이다.

 

시간이 긴 전문투어를 꼭 해보고 싶었다. 늘 설명해야 하는 몇몇 걸작품이 아닌 다른 걸작들도 끼워넣고 좀더 깊이 있는 해설을 하고 싶어서였다. 클라식한 루브르 코스(그리스 조각, 이탈리아 회화, 프랑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회화)에 보통 메소포타미아관을 끼워넣었다. 설형문자, 에비힐 누반다, 구데아왕, 함부라비법전, 사르곤2세 왕궁의 날개 달린 황소상... 때로 욕심을 부려 3층 북구회화관을 진출할 때도 있었다. 반 아이크, 메시스, 뒤러, 크라나흐, 루벤스, 렘브란트, 할스, 데 후크, 로이스달, 베르메르... 

물론 2시30분 쉬지 않고 설명을 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때도 있고, 마치고 나면 거의 녹초가 된다. 투어 막바지가 될 때면 혀는 꼬부라지고 소리는 갈라져 말이 제대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이 증세를 가라앉히려고 애써 사탕을 물고 물도 마셔본다. 실제 내 경우 순수한 관람시간만 2시간30분을 넘기는 게 일반적이었다. 가이드 욕심이란 그런 거다. 꼭 손님을 끌어들일 목적이라기 보다 열심히 들으면 으레 더 해주고 싶은 법... 

 

좀더 나은 해설을 들려주려고 새로 나온 책들을 열심히 읽고 때로 반복해서 읽곤 했다. 자주 가지 않는 북구회화관에 익숙하려고 빈 시간에 심심찮게 올라갔다. 

이제 비오고 바람부는 날 피라미드 광장이나 오르세 앞마당에서 제때 오지 않을 손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