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의 보물
메소포타미아 전시실을 들어설 때마다 "아 옛날이여, 그 화려한 과거의 부귀영화는 다 어디로 가버렸나!" 하고 곱씹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문명을 꽃 피웠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지역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 돌고 도는 게 역사인가. 그래서 공평한가?
사막에서 세라믹 제조술(7000), 관개시설을 통해 과학적인 농업기술(6500)을 개발하고, 신들(50 아누나키)을 섬기기 위한 노예로 만들어낸 인류 기원설([최고 현자의 시], [창조 서사시])을 만들고 놀라운 점성술을 가졌으며, 기원전 3200년 무렵 설형 문자를 만들어 쓰고, 도시(Uruk)를 건설하고 바퀴를 발명한 사람들이며, 그리스 신화의 원형을 만들고 성경의 노아의 방주의 원천인 인류 최초의 문학작품 [길가메시 서사시]를 남긴 메소포타미아의 대단한 유물을 보면서 씁쓸함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일까? 화려한 과거의 추억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 부자는 삼 대 못 가고 권력은 십 년을 못 넘긴다! 그래도 로마 천 년은 꽤 긴 세월 아닌가. 역사를 뒤집어 살펴보는 것은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바라볼 수 있어서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페르시아만 가까운 쪽에서 수메르, 아카드 문명, 오늘날 바그다드쪽에서 바빌로니아 문명, 이라크 북쪽과 시리아에 걸쳐 앗시리아 문명이 꽃핀다. 3천 년을 지속한 이런 화려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들이 만들어낸 설형문자와 함께 기원 전후로 감쪽 같이 사라진다. 지정학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609년 메디아와 바빌로니의 연합군이 앗시리아의 수도 니니베 정복, 539년 페르시아의 황제 CyrusII세의 바빌로니아 정복, 331년 알렉산더의 아케메니드왕조의 바빌로니아 정복, 311년 셀레우시드, 141년 파르티아 제국, +224년 사산조 페르시아, 637년 아랍인들의 메소포타미아 정복)의 침입으로 그들만의 종교와 행정 체계가 무너진다. 사회 문화적으로 헬레니즘화되어 중심이 그리스로 넘어간다.
과학적인 근거로는 기후 변화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특히 남쪽에서 두 강의 연안 지역은 사막화가 진행되어 운하가 말라서 농사짓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을 비롯한 하천이나 육로를 통한 무역이 쇠퇴하면서 교역의 중심지가 지중해로 옮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 앗시리학의 대가 조르주 루(Georges Roux, La Mésopotamie, Seuil, 1985)의 평가대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그들의 문자 체계, 다신교적 종교며 행정체계가 변화된 새 시대에 낡게 되어 새로운 젊은피를 수혈할 수 없어 결국 늙어서 죽는다.
[에비힐 제상, 누반다], 기원전 2500-2300
시리아의 텔하리리(Tell Hariri) 유적지에서 프랑스의 고고탐사반이 1934년 1월에 발굴. 당시(1937년 이전)의 국제법으로는 발굴팀과 그 지역이 반반씩 나눠가지던 시절이다. 프랑스쪽에서 최고 걸작품을 차지하려고 에비힐 누반다를 포함시키고 별 볼일 없는 나머지 유물들을 끼운다. 반대쪽엔 에비힐 누반다를 제외한 대부분의 걸작품으로 꾸며서 에비힐을 차지할 수 있었다.
재질 : 설화석고, 청금석, 역청, 조개껍질
크기 : 높이 53, 너비 21
1950년대에 몸체와 같이 발견된 다리 부분이 사라진다. 최근에 절단된 다리 부분이 다시 선보였다.
갈대로 엮은 의자에 앉아 신을 향해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부드럽고 그윽한 눈매로 입가에는 감탄을 자아내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얼굴 표정을 이 경지로 표현한 조각은 정말 드물다. 나무 관세음보살의 미소인가? 득도한 도사의 표정이다. 물욕이나 권력욕, 게다가 성적 욕망도 초월한 저 편안한 얼굴 표정은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지역의 조상 가운데 앉아 있는 형상은 신이나 왕의 경우가 대부분인데 에비힐 누반다는 예외다. "누반다"라는 지위는 정확히 말해 왕은 아니지만 왕에 버금가는 대단한 지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속국의 지방 통치권자라고 보면 된다.
[아카드(Akkad)의 왕 나람신(Naram-Sin)의 전승비], 기원전 2250년 무렵.
나람신은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왕(2334-2279)의 손자.
기원전 12세기(1160, 엘람의 슈트룩나훈테왕)에 시파르(Sippar)에서 이란의 수사(Susa)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 이란과 이라크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옛날에도 늘 치고 받고 싸웠다. [함무라비법전] 역시 이때 약탈된 것으로 수사에서 재발견된다. 그런데 이런 유물들이 어떻게 루브르에 있을까? 되새겨 볼 일이다.
뿔달린 왕관을 쓴 나람신은 최초로 신격화된 왕으로 일반 병사들에 비해 훨씬 크게 묘사한다. 창에 맞아 쓰러지는 적군과 두손 모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병사를 보라. 이기는 쪽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기운과 왼쪽에 지는 병사들이 쓰러지는 모습들이 대조적으로 묘사된다. 패한 병사들의 자세가 아주 다양하게 묘사된다. 왕의 발 아래 짓밟힌 병사, 목에 창에 꽂힌 사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정복당하는 병사들을 배경으로 큰산이 가로막고 산봉우리 위로 태양신이 자리잡고 있다. 큰산은 이란과 이라크의 경계를 이루는 자고로스 산맥을 나타낸다.
[신전 단면도를 닌기르수(Ningirsu)신한테 바치는 구데아왕(2144-2124)].
닌기르수신은 라가쉬 왕조의 수도 기르수의 수호신으로 북쪽과 북동쪽 산악지대의 야만족(이란)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주는 것으로 여겼다. 구데아는 수메르어로 선지자라는 뜻이다. 박식한 구데아왕은 신전을 많이 지은 왕으로 루브르에 보관된 찰흑 실린더에 새겨진 닌기르수신을 찬양하는 두 개의 시를 지은 장본인이다.
옷자락에 수메르 문자를 잔뜩 새겨 두고 있다. 신전을 지을 때 나무는 어디에서, 돌은 어디에서 보석은 어디에서 가져왔고 마지막에 가서 신전을 훼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고 적어두고 있다. 이런 귀중한 돌은 왕하고 관련되는 유물에만 쓰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서 오만 지역에서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
엄지발가락이 가장 길게 묘사된다. 이런 발을 이집트형 발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목이 달아난 이유는 목을 따로 제작해서 붙여넣는 기법을 쓰기 때문이다.
[물병을 든 구데아왕], 기원전 2120년 무렵.
물병에서 물과 물고기가 솟아넘친다. 물은 생명의 원천으로 엔키(에아 : 인류를 만들어내고 모든 기술을 발명하며 모든 점술의 대가이다. 바빌로니아의 최고의 신 마르둑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신을 상징한다. 옛날 메소포타미아의 왕이 쓰는 모자를 보라. 어깨는 강건해서 무사의 체격이다. 그래도 표정은 온화하고 푸근한 인상이다. 신앙심이 강하고 박식한 구데아왕 답게 옷에 문구를 많이 새겨두고 있다. 이 조각의 오른쪽 어깨에도 에비힐 누반다처럼 문구를 새겨두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750년대, 225*75*45
함무라비왕(1792-1750), 마리 왕국을 멸망시킨다. 그 이후로 마리 왕국은 다시 왕국으로 일어서지 못한다.
앞면 23단 중 7단은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가 지웠다. 뒷면은 총 28단으로 구성된다. 전체 3500 줄이 넘는다.
각각 5단으로 된 전문과 결문은 시적인 문체로 씌어진다. 282조에 이르는 본문은 회화체의 산문으로 기록된다.
아카드 설형문자를 읽는 방법 :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보편적이며 논리적인 법칙을 담은 법전이라기 보다는 함무라비왕 자신이 공평하고 현명하게 내린 구체적인 판결들을 뽑아 기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공평함을 구현한 왕임을 드러내는 판례집이다.
바빌로니아인들한테는 과학이나 법률에서 그리스인들한테 물려받은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나 법칙이 없었다. 자연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의 유사한 결과를 최대한 열거하여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독특하거나 우발적인 경우는 제외시키고 전형적이고 징후적인 것만 취한다. 연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에서 원인을 분별해낸다. 유사성과 인과관계에서 과학적인 보편성을 추구한다. 이렇게 하여 예측하고 가능성을 추론한다.
당시 사회 계층은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유지, 평민, 노예. 눈 수술의 경우, 의료 수가는 유지가 10(80g), 평민 5, 노예 2.
1조 : 어떤 사람이 구체적인 증거가 없이 다른 사람을 살인 행위했다고 고발하면, 고발자는 사형에 처해진다.
8조 : 어떤 사람이 큰 액수의 돈이나 작은 가축 또는 나귀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또는 배 한 척을 훔치면, (...) 게다가 주인이 평범한 시민이라면, 훔친자는 훔친 것의 열 배를 물어주어야 한다. 이 조항에 추가하여 "훔친자가 상환할 것이 없을 때는 사형에 처해진다."하고 부대적인 형벌을 적고 있다. 그런데 농기구 절도의 경우, 훔친 물건의 가치를 넘지 않는 액수로만 처벌한다고 나온다.
195조 : 아들이 아비를 때리면 손목 하나를 자를 것이다.
229조 : 벽돌공이 지은 집이 견고하지 않았을 때 이렇게 지은 집이 무너져 집 주인이 죽으면 벽돌공이 사형에 처해진다. 집이 무너져 집 주인의 아들이 죽는 경우 벽돌공의 아들을 죽일 것이다.
282조 : 노비가 주인한테 "이제 더 이상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다!"하고 선언했다면, 노비가 맞다는 증거가 없을 때는 주인은 노비의 귀 하나를 자를 수 있다.
여자와 가족과 관련하여 67조가 할애된다. 자영업에 61조항.
비석 윗부분의 조각은 함무라비왕이 태양신 샤마쉬를 향해 선서를 하고 태양신은 정의와 심판의 상징이자 건축할 때 필수요소인 줄과 자를 선사하는 모습을 재현한다. 태양신은 앉아 있는데도 함무라비왕보다 조금 키가 크다. 태양신 샤마슈는 신이 쓰는 꼬깔콘(3중관) 모자를 쓰고 어깨 위로는 열선이 뻗어나온다. 고대인들도 이미 이미지로 보여주고 다음에 글로 설명하는 방법을 택했다. 벌써 그때 이미지는 글과 대등한 관계였다.
우리한테 널리 알려진 유태법률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조항은 바로 원조가 함무라비 법전이다. 정면의 아래 부분은 비문이 지워졌다. 12세기(1160년)에 카시트 왕조의 바빌로니아를 쳐들어가 이 보물을 시파르(Sippar)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간 엘람의 왕 슈투룩나훈테(Shutruk-Nahhunte : 1185-1155)가 자신의 승리를 기록하려고 이런 짓을 하였다. 실제 새기지는 않았다. 일부가 복사 형태로 남아 있기는 해도 이 부분만은 완벽하게 복원해내지 못하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을 만든 이는 바빌로니아 사람이지만 결국 이 비석이 발견된 지역은 이란의 수사(Susa)다. 1902년 발굴.
[코르사바드에서 발굴된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2세(721-705)궁의 유물]
기원전 717-706년 사이에 건축. 앗시리아 제국의 최전성기(사르곤2세, 세나케리브, 아사르하돈, 아수르바니팔)의 기틀을 마련한 사르곤2세가 완성 직전에 아나톨리 지역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왕궁으로 지었지만 왕궁(270m*350m : 94500㎥)으로 쓰지 않는다. 이곳을 새 수도로 정하고 거대 도시를 건설했으나 주인공이 사라지자 아들(쉐나케리브)은 이곳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1차 발굴 : 1843년 에밀 보타(Emile Botta), 1846년에 발굴한 유물이 파리에 도착.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최초의 발굴이다.
2차 발굴 : 1850년 빅토르 플라스. 1853년 발굴한 유물을 약 300개의 궤짝에 넣어 티그리스강을 통해 뗏목으로 운반하던 중 노략질을 당해 25 궤짝만 파리까지 도착한다.
사람 얼굴에 날개를 단 황소상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설치된 조각이었다. 귀를 쫑긋하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왕이 쓰는 모자를 쓰고 위로 솟아 오르는 네 개의 뿔, 솔방울 형 귀와 김밥말이 형 수염을 보라. 앞에서 보면 서 있는 자세를 표현하기 위해 발 두 개를, 옆에서 보면 걸어가는 자세를 묘사하기 위해 발 네 개를 보여준다.
이 맞은 편 벽면의 두 황소상은 복제본으로 미국 시카고에 소장된 것을 재현한 것이다. 코르사바드에 발견된 황소상과 비슷한 조각상은 영국 런던 브리티쉬 뮤지엄, 미국의 시카고, 독일의 베를린에도 보관되어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마지막 부분이 노아(우트나피쉬팀 Utnapishtim, Atrahasis)의 방주 이야기)를 재현하듯 한 손으로 사자를 제압하는 영웅. 구체적으로 길가메시 영웅을 나타낸다기 보다 이상화시킨 왕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길가메시 영웅은 2600년 무렵 우룩(Uruk)의 다섯 번째 왕.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 영웅의 모델이 된다.
왼쪽 발치에 앉아 데생하는 모녀를 보면 그 규모가 웅장하기 그지 없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내가 맨 처음 혼자 루브르에 들어왔을 때 압도당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르곤2세궁의 유물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타니스에서 발견된 고대 이집트의 대형 스핑크스였다. 그 앞에서 나는 현대 예술품이 너무 왜소하다고 느낌과 동시에 인류문명의 발달을 다시 생각하였다. 피라미드에서 나온 사물들을 보면 이미 그 옛날에 웬만한 것은 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