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2014)
얼마 전부터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지난 시절 좋아하던 팝송을 들으며 난 무척 행복해진다. 잊어버린 노래를 되찾고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이 참 좋다. 노래가락은 귀를 울리고 뇌리로 파고들어 가슴 한 구석을 적시며 손가락 끝까지 떨리는 전율을 일으킨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가슴 저미게 슬퍼지기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감동은 약 기운 퍼지듯 가슴을 뒤덮고 흘러넘쳐 뇌로 올라가 눈물까지 나게 한다.
공연 현장에서 느끼는 감동은 훨씬 직접적이라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가 되면서 실신하기도 한다. 록이나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 뮤직비디오를 보면 극성 팬들은 신들린 듯 몸을 흔들고 귀청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러댄다. 청중이 지르는 괴성이 음악 소리를 먹어버린다. 이 괴성보다 더한 찬사가 어디 있겠는가! 감동을 주체할 길 없어 눈물을 펑펑 쏟고 무언가를 마구 흔들어대며 머리를 쥐어 뜯고 옷을 벗어젖힌다. 몸을 부르르르 떨며 경기를 일으킨다.
비틀즈의 실황 뮤직 비디오를 보면 광적인 젊은 여성팬들의 괴성은 가히 폭발적이다. 매미처럼 쉴새 없이 울어대거나 제트기가 날아가는 굉음을 낸다. 실황 운데서도 특히 1964년의 멜버른(Melbourne), 헐리우드 보울(Hollywood bowl), 워싱턴 콜리세움(Coliseum), 1965년의 뉴욕의 쉐아 스타디움(Shea stadium)의 공연 비디오를 보라. 춤추는 것만으로 북받치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다. 넋 나간 상태로 신들린 듯 손뼉을 치며 머리를 도리도리 흔든다. 너무 기쁜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발작적으로 팔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펑펑 흘린다. 잠시도 엉덩이를 의자에 댈 수가 없다. 좁은 자리에서도 펄쩍펄쩍 뛰어오른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어 무대로 돌진하기도 한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경기를 일으키고 발작증세를 보이며 실신하기까지 한다. 새로운 감성을 담아내는 에너지 넘치는 비틀즈의 연주와 노래에 화답하는 용솟음치는 환호성은 그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다. 청중들은 담배나 술보다 마약을 하고 싶어진다. 몸과 마음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게 바로 소리가 주는 매력이다.
해마다 유월에 열리는 가렌느의 축제날 볼테르 길과 시장터를 가득 메운 벼룩시장에서 잊어버린 옛날 물건들이 여기저기 불쑥불쑥 솟아났다. 벼룩시장에 가면 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런데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면 이젠 희미하게 잊혀진 과거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난다. 굳이 프루스트의 ‘마들렌 일화’에 견줄 필요는 없다. 미각보다 청각이 불러일으키는 무의식적 기억현상이다. 네르발은 [실비 Sylvie]에서 “시골의 꽃다발 축제”라는 짤막한 신문 광고를 보고는 한 밤중에 마차를 타고 고향 마을 발루아(Valois)의 축제와 얽힌 과거로 바로 되돌아간다. 이건 읽기에서 촉발되는 무의식적 기억이다. 그 보다는 네르발이 [소금 밀매꾼들 Les Faux Saulniers]에서 상리스(Senlis) 대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루소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소리가 주는 호소력은 대단하다.
송창식의 “딩동댕 지난 여름”은 대번에 녹두골목 어귀의 학사주점 ‘탈’의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막걸리와 소주 냄새가 퀴퀴하게 착색된 뭉툭해진 앉은뱅이 나무탁자를 숫가락으로 두들기며 노래 부르던 그 시절로! 289 종점을 생각하면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진 ‘신한다방’, 신한다방의 “홍차”라고 나를 부르던 여사장님이며, 디제이 아가씨와 ‘광장서적’, 광장서적 옆 ‘곰돌이’가 염주알처럼 엮여 떠오른다. “하얀 손수건”은 감기를 끙끙 앓을 때 학교를 결석한 채 카셋트로 참 많이 들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액땜하듯 꼭 겨울에서 봄으로 갈 즈음 감기로 앓아눕곤했다. 내가 태어난 무렵이기도 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철이기도 하다. 왠지 이 무렵에 죽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팝송 가운데 하나가 매리 홉킨의 “Those were the days”이다. 어떤 곡은 멜로디가 좋아서 어떤 곡은 기타 연주가 훌륭해서 아니면 가수의 목소리가 맘에 들어 좋아하지만 이 곡은 가사 내용이 그럴 듯해서이다. 긴장감 넘치는 극적인 곡조도 서정성이 풍부하다. 애조띤 첼로 반주는 멜랑콜리하다. 이 곡의 작사 작곡은 그 유명한 멜로디의 귀재 폴 매카트니. 희한하게 파리의 메트로에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참 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곤 한다. 꼭 내 얘기를 듣는 것 같잖아!
나이가 훌쩍들어 오랜 만에 젊은 시절의 친구를 단골 술집에서 다시 만난다. 외모는 다 변했어도 젊은 시절의 원대한 꿈은 여전히 진행형인 친구가 그 옛날 자신만만하게 온 세상이 제것인 양 법썩치던 시절과 하나 변함없이 술집의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그 옛날의 원대한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우린 늙고 말았네! 이게 울고 웃고 지지고 볶고 그저 그렇게 사라지는 보통사람의 삶!! 나중에 알았지만 인생을 달관한 듯한 가사를 부른 가수는 젊디젊은 열여덜의 아가씨였다.
하긴 알고 있던 곡만 듣는 것은 아니다. 같은 가수나 그룹의 몰랐던 노래를 새로 좋아하기도 한다. 예전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룹의 진면모를 재발견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콜피언스이다. 무엇보다 스콜피언스의 단순성이 맘에 든다. 리듬과 멜로디가 단순한데다 반복적이어서 귀에 쉽게 다가온다. 가사 또한 무척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게다가 멜로디는 감미롭고 발랄하며 경쾌하다. 하긴 이런 특징들은 대중음악에 공통된 속성이기도 하다.
나이들수록 점점 단순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된다. 그림에서도 단순한 형태에 단순한 선을 보이는 호퍼나 리히텐스타인의 작품이나 기하학적이며 단순한 선과 원색으로 구현된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문학작품에서 실험성이 강하고 기법이 복잡하며 모던한 작품을 무턱대고 뒤좇던 시절이 있었다. 조이스와 프루스트는 지금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이제는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소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탕달의 작품을 좋아한다. 정열의 화신 줄리앙 소렐이나 파브리스 델동고 같은 인물이 좋다. 억누를 수 없이 용솟음치는 정열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만 넘을 수 없는 현실의 장벽에도 아랑곳 않고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적과 맞서 싸우다 실패하는 소영웅이 맘에 든다. 영웅이 사라진 시절에 영웅을 꿈꾸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실패한 소영웅 이야기 말이다. 돈키호테가 최초의 근대적인 주인공인 까닭은 바로 이런 면모를 맨 처음 드러낸 인물이어서이다. 현실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이 중세시절의 전설적인 기사도를 흉내내다 현실을 파악하지 못해 울지 못할 희극이 벌어진다. 그리스의 신들은 못난이 신 뛰어난 팬플룻 주자인 팬에서 계보가 끊어진다. 신이 영웅이 까마득한 그 옛날에 없어진지도 모르고 이상형을 좇아가는 시대착오적인 우리의 쪼그라던 소아적 영웅은 그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저 외롭게 비극을 희극적으로 연기하다 파멸의 길을 걷는다. 이젠 하다 못해 소영웅적 주인공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 쪽으로 추락해버렸다. 영웅 모방도 못하고 그저 으스대거나 깝죽대는 주먹 수준으로. 그래도 우리 시대는 끊임없이 람보처럼 초능력을 갖춘 영웅을 만들어낸다. 왜소해져버린 자신의 옛 모습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그런 식으로 드러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몸에 초능력을 갖춘 신들이 현대판으로 다시 나타난다. 사람들은 늘 따르고 의지할 대리인이 필요하다. 그게 신이고 영웅이며 구세주이다.
무엇보다 스콜피언스가 새로 좋아진 것은 가수의 목소리 덕분이다. 고음까지 쉽게 올라가는 멜랑콜리한 음색은 매력이 넘친다. 음색이 맑고 따뜻하며 경쾌하고 정열적이다. 이 모든 요소보다 내가 반하는 것은 남유럽 사람 특유의 목소리에서 나는 금속성이다. 물론 스콜피언스의 가수 클라우스 마이네는 독일 사람이다. 이 금속성엔 차가움이 아니라 태양 같은 뜨거움이 배어 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가수 아드리아노 첼렌타노, 움베르토 토치, 토토 쿠투뇨, 에로스 라마조티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리라. 클라우스 마이네의 음색은 한편 맑고 가벼우며, 다른 한편 태양열에 후끈 달아오른 금속 표면이 내뿜는 끈적함이 스며 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삶의 환희가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피카소의 그림 [해변으로]가 겹쳐 떠오른다. 그 용솟음치는 힘과 금속성의 열기에서 아드레날린이 무한정 분비될 것 같다. 요즘 집을 나서 역으로 가며 스콜피언스를 즐겨 듣는다. 아침에 스콜피언스를 들으면 마음이 상쾌해지고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Always somewhere, Holiday, Living for tomorrow, Still loving you...
어떤 록 그룹의 경우 사운드에 비해 가수의 가창력이 못 미치는가 하면, 반대로 가수는 훌륭한데 연주가 못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둘 다 완벽한 조화를 이룬 전설적인 록 그룹들이 대중들의 우상이 된다. 나도 이런 불세출의 록 그룹을 좋아한다.
둘 다 너무 완벽한 ‘퀸’이 있다. 신이 내린 가창력을 자랑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과 퀸의 사운드는 너무도 완벽하게 어우러져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다. 유일한 흠이라면 이런 완벽성 때문에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게 흠이라면 지나친 찬사일까. 이런 완벽한 조화에서 컴퓨터로 연주한 듯한 뭔지 모를 기계적인 느낌이 묻어난다고 하면 너무 큰 기대 때문일까. 폴리포닉한 완벽한 화음, 기타와 드럼, 피아노의 적당한 무게감에도 난 어쩔 수 없는 인공성을 느낀다. 이래서 퀸에 무조건 빠져들지 않는다. Bohemian rhapsody,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Don't stop me now, Love of my life...
사운드와 보컬의 절묘한 조화로 예술성이 확보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신고전주의 그림이나 조각이 주는 기하학적이고 잘 마무리된 아름다움에서 아쉬운 여운이 남는 것과 마찬가지일 터다. 엄밀히 말하면 퀸에서는 프레디 머큐리의 보컬이 사운드를 앞지른다고 해야겠다. 역시 전설적인 헤비메탈 그룹인 레드 제플린에서는 로버트 플랜트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전설적인 연주자들에 묻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차지하는 솔로가 돋보일 때가 많다. 존 본햄의 드럼도 레드 제플린을 전설로 이끌어올린다. Black dog, Celebration day, Kashimir, Rock and roll... 느린 템포에 반복적인 리듬을 주로 구사하는 블랙 사바쓰도 오지 오스본의 보컬이 헤비메탈 사운드에 뒤처지는 느낌이다. Paranoid, Iron man, She’s gone... 순수한 연주곡이 많은 산타나의 경우 보컬에 비해 카를로스 산타나의 리더기타가 압도적이다. Black magic woman, Dance sister dance, Evil ways... 마이크 올드필드 그룹도 보컬보다는 리더인 마이크 올더필드의 기타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가 만들어내는 연주가 돋보인다. 보컬 없는 순수 연주곡이 많다. 세련되고 도회풍이거나 산사에서 흘러나옴직한 선적인 멜로디나 보컬이 곁들어지더라도 청아한 가수의 목소리가 참 맘에 든다. Moonlight shadow, Shadow on the wall, Family man… 좀 정신없는 사운드로 정열적이고 흥겨운 멜로디를 구사하는 유라이어 힙도 리더싱어가 여럿이지만 연주와 노래가 조화를 잘 이룬다. July morning(David Byron), Lady in black(Ken Hensley), Sympathy(John Lawton), Easy living(Gary Thain)… 레인보우의 경우 경쾌한 춤곡품의 로맨틱한 멜로디에 잘 어울리는 로니 제임스 디오의 보컬이 균형을 이룬다. Black sheep of the family, Kill the king, Long live rock n’ roll, The temple of the king(Doogie White)… 디퍼플의 경우 이얀 길런(Ian Gillan)의 보컬과 연주가 잘 어울린다.
한때 나는 비틀즈 네 멤버의 음성을 구별하려 애쓴 적이 있다. 하긴 그 시절엔 누가 누군지 멤버 개인에 별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저 비틀즈라면 무턱대고 열광하던 팬이었으니까. 솔직히 멤버 각자의 이름 정도나 겨우 아는 수준이었다. 기껏해야 앨범 자켓이나 팝송책을 통해 비틀즈의 사진 몇 장 본 게 전부였다. 그러니 얼굴도 누가 누군지 잘 모르던 판에 각자의 음성을 구분하려들다니… 그 시절엔 비틀즈의 위대한 업적을 들추며 매료된 것 또한 사실이다. 빌보드 차트에 오른 1위 곡이 몇 개며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었나 하는 류였다. 비틀즈는 정말 오래된 나의 우상! 이젠 우상이 신이 되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들은 이미 팝계의 무서운 아이돌이었다. 팬치고는 세대 차가 성큼 나는 한참 뒤늦은 팬이다. 고등학교 들어가는 시험을 마치고 나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존 레논 특집의 팝송책을 산 일이다. 고등학교 앞 길에 있는 54레코드점 주인이 선곡해준 비틀즈 카셋트 두 개를 퍽 자주 들었다.
그래도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 멤버는 폴 매카트니다. 존과 함께 리드싱어로 활약한데다 인물이 가장 훨친해서 일테다. 그렇지만 존 레논과 두엣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이 되면 누가 폴이고 누가 존인지 아리송해진다. 악기와 함께한 사진에서 드러머인 링고 스타를 찾는 일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리드기타를 치며 백코러스에 많이 참가하는 조지 해리슨에 대한 관심도 크게 없었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샘물 같은 신선한 사운드와 기막힌 화음에만 관심이 쏠렸으니까.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은 솜사탕처럼 감미롭다. 비틀즈 음악이 한참 시간이 흐른 다음 들어도 신선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어쨌든 이 때문에 난 비틀즈를 계속 좋아한다. 내 친구 J와 나는 비틀즈를 팝의 모차르트로 견주는데 동감하였다. 언제 들어도 새롭고 탄력넘치는 멜로디! 흥겹고 가볍지만 아리한 슬픔이 배어나는 곡조!! 무엇보다 삶의 환희를 노래하는 용솟음치는 그 엄청난 에너지!!! 이건 이십대만 가능하다. 언제 들어도 신선한 비틀즈 사운드는 용솟음치는 에너지를 통해 가뭇없이 가버린 젊음을 되살려준다. 게다가 상상력을 자극해서 뭔가 쓰고 싶다는 욕망을 부채질한다.
난 희한하게 비틀즈 마니아와 쉽게 친해졌다. 비틀즈를 매개로 친구가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때 나랑 내밀했던 친구들은 거진 비틀즈 열광팬이란 걸 우연히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성향이라는 게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서도 나타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J는 비틀즈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서 나랑 가장 잘 통했던 친구다. 노래방에서도 우린 으레 각자 좋아하는 비틀즈 곡을 부르곤했다. She loves you. Hello goodbye, Something, Yellow submarine, And I love her, Come together, Yesterday… J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난 다시 프랑스로 오면서 우리는 연락이 끊어졌다.
묘하게 J와 함께 친했던 H. 겨울방학 동안 편지교환으로 우린 무척 가까워졌다. 그는 꽃으로 디자인 된 봉투며 편지지로 쓴 두툼한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그 한 겨울처럼 우체부를 그리도 목빼 기다린 적도 없다. 편지 내용 가운데 좋아하는 비틀즈 노래를 얘기하게 되었다. 나더러 "섬세한 말더듬이"라 하던 그가 좋아한 곡들이다. Penny Lane, Fool on the hill, Eleanor Rigby, Nowhere man… 그 때를 생각하면 “우울한 샹송”이 떠오른다. 그와 난 대형 강의동에서 붙어 앉아 인류학 개론을 같이 들었다. 강의는 뒷전으로 한 채 필담을 나누다 중간에 빠져나와 원형극장으로 올라간 적이 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우며 속내 얘기를 오래 주고받았다. 우리는 해가 설핏해지면 내려와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카페 ‘베리’로 가곤했다. 그때마다 "솔" 한 갑과 라이타를 하나 사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오래 연락이 끊겼다가 우리가 다닌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그 때 우리는 음악이 아닌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번역 이야기를 나누고는 그 뒤 전화 연락만 몇 차례 하고는 내가 프랑스로 되돌아오면서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끊임없이 화려한 변신을 하는 그는 전공을 바꿔 미학과 대학원을 다닌다더니 그때는 도예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이 둘보다는 덜 친한 관계였지만 같은 과 복학생 선배 D가 있다. 이 형도 내가 좋아한 M을 역시 좋아한 묘한 인연이 있다. 대학 4학년 때 여름 월드컵 한국전 한 경기를 본다고 그 형네 집을 간 적이 있다. 그의 집에 갔을 때 그가 비틀즈 마니아란 걸 알게 되었다.
교문 앞 시위가 격렬한 날이었다. 이 날도 최루탄이 교문 안쪽에 폭죽처럼 날아올랐다. 최루탄 냄새는 멀리서도 재채기와 콧물을 나게 하고 은행잎이 노랗던 가을 날 오후였다. J가 대뜸 자기 과 친구 집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 친구는 비틀즈의 음반은 물론 기록 영화 같은 것도 죄다 있다나! 최루탄은 봉천동으로 가는 언덕배기 너머까지 바람에 실려왔다. 순환도로에서 관악산 기슭 언덕쪽으로 제법 올라가서 그 친구의 집이 있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이 아니라 그가 혼자 쓰는 집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비틀즈의 뮤직 비디오를 보았다. 소리로만 들어왔던 비틀즈에 가까운 실체와 만난 셈. 지금도 뇌리에 박힌 이미지는 영국여왕이 참석한 공연실황이다. 체면 몰수하고 발광하는 젊은 여자팬들의 발광의 도가니를 담은 화면은 좀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인상적인 장면은 비틀즈의 미국상륙 장면이다. 미쳐날뛰는 팬들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려 엄청난 숫자의 말탄 경찰들이 과격한 시위를 진압하듯 동원된 진풍경이었다. 대중가수의 공연장에서 진풍경 중 하나는 풍속경찰이 왔다갔다 하면서 관중들을 감시하는 장면이다. 괴성을 지르며 평펑 눈물 흘리는 어린 십대 소녀팬들한테 끊임없이 티슈를 뽑아주는 아줌마도 무척 인상적이다. 내가 오디오 셋트며 비디오 기기까지 갖는 일이 요원하던 시절이라 그 친구가 부럽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리버풀을 몸소 여행하고 수집해온 거였으니… 학교에서 한두 번 마주친 거 빼고는 그와는 더 이상 만나지는 않았다.
라디오를 통해 주로 음악을 듣던 무렵 에프엠에서 디제이가 들려주는 노래를 통해 음악을 접하던 시절이다. 중학생 때 영어 실력이 변변찮아 노래 제목을 듣고 내가 아는 단어들을 얼기설기 조합해 적곤 하였는데 어처구니 없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디 블루스의 “For my lady”. lady란 단어와 ready 사이에서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다. 노래 제목은 그 나마 나았지만 고유명사인 가수나 밴드의 이름을 받아적기는 역부족이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내 짝이던 재윤은 팝송을 나 만큼이나 좋아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녀석은 내 등을 드럼치듯 두드리며 엘턴 존이나 비지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를 부르곤했다.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Saturday night’s fever, The Boxer… 국어시간에 일어서서 책도 제대로 읽을 용기도 없던 나와는 달리 재윤은 활달한 성격이었다. 녀석의 가창력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 주변 셋째에서 넷째 줄에 앉는 친구들은 가요를 더 좋아했다. 녀석이 좋아하는 노래는 나랑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한창 유행하는 팝송임에는 차이가 없었다. 공통되는 면도 있었다. 둘 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팬이었다. The sound of silence, Bridge over troubled water, Scarborough fair… 폴 사이먼의 시적인 가사에는 어려운 단어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나름 팝송 가사를 통해 영어 실력을 향상한다는 자부심으로 우쭐대던 시절이다. 하긴 그 시절은 새로운 단어를 보기만 해도 기억하던 때였다. 재윤은 자기 형이 전파사를 했으니 전축으로 음악을 듣고 가수, 곡명, 가사에 대한 정보가 나보다 정확했다. 그래서 팝송 가사를 알고 있었다. 한번은 재윤과 내가 한국 가요를 영어로 옮겨 보았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그래도 영어실력이 일취월장한 상태였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지만 또래 친구들보다 우리는 분명 영어 실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었다. 까다로운 관계대명사 용법에 골머리를 앓던 시절 시 형식에 간결한 내용을 담은 가사 해독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라디오에서 카셋트 달린 라디오를 가진 건 그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카셋트를 통해 좋아하는 노래를 되풀이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나! 주로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듣곤 했다. 이렇게 하면서 제목을 익히고 멜로디에 익숙해지면 녹음된 순서까지 다 기억하게 된다. 페티 페이지, 클리프 리차드, 존 덴버, 비틀즈, 비지스, 아바, 사이먼 앤 가펑클… 한 면이 끝나면 뒷면을 듣기 위해 카셋트를 돌려끼웠다. 언제부터인가 자동으로 바뀌는 기능이 생겼지만 그 전엔 그랬다. 카셋트 헤드부분에 테이프가 먹혀 들어가는 날이면 조심조심 빼내어 감고 한 두 번 빠르게 공회전을 시켜 원상태로 되돌린다고 애먹었다.
그 무엇보다 에프엠에서 들려주는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서 내 걸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정말 뿌듯했다. 난 한때 디제이가 될 꿈을 품은 적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도 실컷 듣고 듣는 이한테 즐거움을 주는 직업. 괜찮을 듯했다. 고등학교 앞길에서 집으로 가는 16번 버스타러 가는 길에 있던 [54 레코드점]을 자주 들렀다. 아직도 상호가 머리에 맴도는 걸 보면 음악하고 얽힌 기억은 참 오래간다. 이 레코드점의 상호를 딴 얼치기 글을 쓰기도 했다. 대학 들어가 대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때면 음악 감상실을 자주 이용하였다. [행복의 섬]에서 처음으로 레이저 디스크를 통해 대형화면으로 뮤직 비디오를 보았다.
요즘엔 유투브에 들어가면 모든 노래를 다 들어볼 수 있다. 이름이나 목소리만 알던 가수나 연주자의 얼굴을 그것도 전성기의 모습을 보며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것도 다양한 버전으로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공짜로! 목소리만 듣다가 화면을 보며 음악을 듣는 건 참 장점이 많다. 특히 실황 뮤직 비디오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그렇지만 목소리만 들으며 상상하는 것은 줄어든다. 이미지의 강렬함이 소리를 쪼그라들게 만든다. 이젠 음악을 듣는 차원이 아니라 보는 차원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었다. 그 소리라는 것도 효과음으로 처리된 게 대부분이다. 실황이라고 해도 립싱크가 대부분이다.
최근에서야 처음으로 매리 홉킨의 실물을 보았다. ‘비온다 에 그라쏘타 bionda e grassota’. 티치아노의 르네상스풍 미녀를 떠올림직했다. 볼이 통통하며 광대뼈가 보일락말락하고 각지면서도 둥근 얼굴에 윤기나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늘씬하며 건강미가 넘친다. 소프라노인 그녀의 목소리는 소녀풍에 참 맑은 음색이다. 역시 소녀풍인 프랑스 갈 같은 윤기 넘치고 통통 튀는 음성이 아니라 단아하고 청아한 고전적인 목소리다. 유명한 포크송 가수 조안 바에즈의 음색과 많이 닮았다. 그런 음색이라면 나나 무스쿠리도 있다. 무공해 천연 사이다 같은 음성인 셈. 한편, 카펜터스의 카렌의 목소리는 융단결보다 더 곱고 매끈하며 모성애를 자극한다. 특히 저음부에서 솜사탕처럼 그렇게 풍성하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익히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음에서도 전혀 불안하지 않고 편안하게 올라간다. 카펜터스 그룹에서 카렌의 목소리를 빼면 뭐가 남을까? 모든 게 그녀의 목소리를 위한 들러리란 생각이 앞선다. 그만큼 카렌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독보적인 음성이다. 언젠가 커피 광고에서 본 크림과 향이 퍼져나가는 그래픽을 연상케 하는 그런 목소리다. 오랜 만에 카펜터스의 노래를 듣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Top of the world, Superstar, only yesterday, Rainy days and mondays… 한데 나보다 열 살 위인 작은 형 세대가 즐겨 듣던 포크송들이다.
긴 곡은 일단 집중해서 듣기가 쉽지 않다. 비틀즈의 경우 대부분의 곡이 길지 않다. 기껏 Hey Jude, I want you(She’s so heavy), A day in the life,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정도가 긴 축에 속한다. 대중음악의 길이는 삼 분 삼십 초를 넘지 않는 게 좋다. 관심을 사로잡아 지루하지 않을 가장 적당한 길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자칫 지루해지기 쉽고 처음의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기 힘들다. 템포가 빠르면서 비트가 강한 비틀즈의 노래가 짧은 점이 분명 성공을 거둔 열쇠 가운데 하나다. 음악성이 높은 그룹일수록 긴 곡들이 많고 노래부분에 비해 연주 비중이 크다. 디퍼플,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레인보우의 경우 긴 곡들이 많다. 게다가 연주가 차지하는 부분이 노래에 비해 긴 편이다. 멜로디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곡이 많다.
소리에 유독 예민한 나는 목소리에 아주 민감하다. 어떤 사람이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호감형이 아니어도 차츰차츰 거부감이 사라진다. 그런데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는 참 참기 힘들다. 희한하게 나는 목소리가 좋은 사람한테 쉽게 매료당한다. 그 목소리가 톤이나 뉘앙스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교양도 다 묻어 나온다. 요즘들어 음악을 들을 때 일어난 또 한 가지 변화는 목소리에 점점 더 집착하게 된 점이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훌륭한 악기가 달리 있으랴. 고전음악도 오페라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다. 대중음악에서도 연주보다는 가수의 가창력에 치우쳐 듣게 된다. 목소리가 주는 느낌은 그 어떤 악기로도 흉내낼 수 없을 뿐더러 호소력 또한 강하다. 샤우트 창법으로 이름을 날리는 헤비메탈 가수들도 발라드풍으로 부를 때는 곱고 섬세한 목소리가 돋보인다. 로버트 플랜트, 믹 재거, 이얀 길런, 클라우스 마이네… 밴드의 반주를 완전히 압도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강렬한 와인하우스의 목소리는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이 압권이다. 끈적끈적한 점액성의 목소리로 흑인이 부르는 블루스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와인하우스의 블루스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가창력을 따로 치더라도 목소리 자체가 가진 매력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매리 홉킨, 카렌 카펜터, 존 레논, 로버트 플랜트, 켄 헨슬리, 클라우스 마이네… 아무리 노래를 잘하더라도 목소리 자체가 주는 매력이 없으면 아무 감동이 없다. 매력적인 목소리는 귀를 즐겁게 하고 가슴을 떨리게 하며 나아가 영혼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아름다운 목소리에 홀리고 나면 헤어날 길이 없다. 황홀한 목소리로 뱃사람들을 홀린 사이렌을 떠올릴 필요가 없겠다. 뭐니뭐니해도 아름다운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다. 그러고 보면 리라 연주로 사이렌의 목소리를 잠재운 오르페우스는 정말 위대하다. 지옥의 신까지 감동시켜 오르페우스를 지옥에서 빼내올 수 있게 허락받았으니. 아뿔사! 지상으로 나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다가 유리디체를 두 번 잃고 만다. 물론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연주하며 덩달아 노래를 불렀기 싶다.
가렌느의 우리 집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직선거리 백 미터 정도에 있었다. 7층 아파트라 소리가 퍼져 올라와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면 애들이 재잘대는 새된 소리가 곧잘 귀청을 울렸다. 운동장에서 뛰노는 애들의 목소리는 종달새의 날카로운 노래처럼 들린다. 어린 아이들이 내지르는 새된 소리는 중고등학생이 내는 소리보다 훨씬 높고 날카롭다. 목소리의 기가 세다고 보아야 하나. 갓난애가 우는 소리는 아파서 우는 게 아니면 그리 슬피 들리지 않는다. 애기의 울음은 절대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다. 울음을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의 목소리는 천사의 소리다. 때묻지 않은 순수하고 해맑은 소리다. 변성기 전의 소년으로 구성된 파리나무 소년 합장단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라. 청소년기가 되면 순수함은 사라지나 목소리에 힘이 생기기 시작한다. 물오르는 봄철의 나무처럼 에너지가 넘치면서 윤기가 자르르르하다. 이 때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소리다. 이십대에 이르면 젊음과 성숙함이 어울려 혈기왕성한 힘과 윤기가 조화를 이룬다. 삼십대 중반에 접어드면 카랑카랑함이 서서히 가시면서 성숙함이 최고조에 이른다. 마흔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윤기가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한다. 오십줄엔 무엇보다 목소리에 힘이 줄어든다. 그래도 몸의 변화에 비해 목소리의 노화는 느린 편이다. 목소리도 나이에 맞춰 늙어갈 수밖에 없다. 몸이 눈에 금방 드러나며 변화가 일어나는 대신 목소리는 그래도 비교적 젊음을 오래 간직한다. 그것도 관리를 잘 해야겠지만 얼굴에 비치는 피부의 변화보다 덜 느껴진다. 특히 고함치며 에너지를 한껏 써 소리를 질러대는 헤비메탈 그룹의 가수는 나이들면 매력이 많이 떨어진다. 그렇게 날카로우면서도 감미롭게 쩌렁쩌렁 울리던 로버트 플랜트의 목소리가 십여년이 지난 다음 몸짓과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나 목소리는 영 아니다.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 반면 제법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시절 못지 않게 불을 내뿜듯 포효하는 디퍼플의 이얀 길런이나 레인보우의 로니 제임스 디오도 있다. 여기에 스콜피언스의 클라우스 마이네도 포함된다. 그렇지만 저음에서는 부드럽고 풍성하게 울려퍼지고 고음에서는 날카롭고 우렁차며 박력넘치는 호소력 강한 목소리로 팬들을 사로잡은 이얀 길런이 머리가 다 세고 근육질이 쪼그라든 채 목소리는 갈라지고 제대로 새어나오지 않는 지금까지 무대를 누비는 모습은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전에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역시 대단히 열정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던 레인보우의 로니 제임스 디오는 아직 활동할 수 있는 67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반항기 잔뜩 밴 목소리로 고함치듯 노래하는 도어스의 짐 모리슨이 칠십대가 되어 카랑카랑함이 없어진 상태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요절했기에 거칠고 덜 가다듬어진 짐 모리슨의 음색은 늘 젊게 살아남아 있다.
요절한 유명인은 늘 젊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 젊어 죽었기에 늙은 모습이 없다. 그리하여 늘 영원한 청춘으로 머문다. 일찍 죽어도 보통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무덤으로 살아남아 팬들을 귀신처럼 사로잡는다. 스물 넷 새 파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어 영원한 반항아로 남은 제임스 딘, 그를 빼다 박았으며 그 보다 더 어린 스물 한 살에 뇌출혈로 숨진 한 때 비틀즈 멤버였고 촉망받는 추상화가 스튜어트 슈트클리프도 참 아까운 인재다. 인기를 한몸에 누리던 대중스타, 게다가 재능이 걸출한 팝 아티스트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죽으면 팬들한테 이를데 없는 아쉬움을 남기기 마련.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훌륭한 작품활동을 펼쳤을 텐데… 작품활동은 둘째치더라도 삶조차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죽은 뮤지션이 적지 않다. 스물일곱 클럽이란 말이 돌 정도인 유명인으로는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쿠르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곡성으로 농촌활동을 갔을 때 그 마을의 노총각이 스물아홉이라는데 무척 놀랐다. 어찌 저토록 나이가 많을 수 있나! 저 나이까지 살 필요가 있을까? 스무살이던 내가 볼 때 그는 엄청 늙었다고 여겼다. 카렌 카펜터스는 서른 둘에 세상을 떠난다. 레개 음악의 대명사 봅 마를리는 서른 여섯에 암으로 죽는다. 마흔에 죽은 존 레논의 경우는 타살이다. 대부분 마약이나 알콜에 지나치게 의존하다가 죽은 경우가 많다.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인기인은 그 인기를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때가 온다. 또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인기가 떨어졌을 땐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인 공황을 맞는다.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카렌 카펜터스는 거식증으로 죽는다.
인기란 정말 대단한 것이라 무덤까지 따라간다. 유명인이 묻힌 공동묘지를 가보라. 아무말없이 누워사는 이 동네는 얼핏 보아 조용한 것 같지만 불평등이 훨씬 더 심하다. 태어날 때나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불평등하다. 파리의 페르 라쉐즈에는 명사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그 중에 도어스의 가수 짐 모리슨이 있다. 그는 죽어서도 팬들을 수없이 끌어모은다. 부러우면 일단 이름을 날리고 볼일! 어차피 인간은 불평등하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유명인들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를 가 보면 이 불평등의 정도는 최고조에 이른다. 얼마 있으면 후배한테 자리를 물려줄 보통 사람들 사이에 유명인은 나보란듯 누워있다. 별볼일 없는 이웃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도 그는 아랑곳 없다. 그의 집은 전세가 아니라 제 집이어서 때가 되어도 옮길 필요가 없다.
같은 간판으로 죽 몇 십 년 활동한 그룹에 경의를 표하자. 비록 단원들이 들락날락하더라도 줄기차게 이어온 그룹에 큰 박수를 보내자. 십대말 새파랗게 젊은 시절부터 머리가 하애지고 얼굴엔 죽음의 꽃을 피우고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뮤지션들한테 다시 한번 기립박수를 보내자.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디퍼플, 핑크 플로이드, 유라이어 힙, 스콜피언스… 삼십줄에 들어설 즈음 해체된 비틀즈 그룹은 팬들을 위해선 잘 된 일이다. 같은 멤버로 십 년 가까이 그것도 정상가도를 달리다가 인기절정에서 이미 전설이 된 이 그룹이 내리막길만 남은 시점에서 아름다운 새출발을 했다.
같은 노래의 서로 다른 버전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사람이 나이들어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십대 중반까지 비틀즈의 실황을 보면 그야말로 에너지가 넘치고 연주가 경쾌하고 흥겹다. 삼십대가 가까워지면 음악에서 깊이와 원숙미가 느껴지지만 그 이전의 풋풋함과 신선함은 없다. 갸냘프다 싶을 정도의 날씬한 몸매에 뚜렷한 얼굴 윤곽은 삼십대에 가까와지면 누구나 서서히 선이 부드러워지면서 둥그스럼해진다. 보통 사십이 되면 몸매에 선은 사라지고 목소리에 윤기와 더불어 카랑카랑한 맛이 가기 시작한다. 연주자로선 날엽한 몸놀림이 굼떠지긴해도 한결 노련미를 보여주는 게 사실. 가수는 시간이 주는 마모의 정도가 쉽게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경우가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 볼과 턱선이 날카로운 얼굴에 풍성한 금발 곱슬머리를 흔들어대던 그는 1970년까지는 목소리에 카랑카랑한 힘에다 울림이 깊고 윤기가 자르르르 하다. 그 뒤 그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맛이 가기 시작한다. 1973년의 영화로 제작된 뉴욕 실황까지는 그런대로 괜찮다. 그럼에도 예전의 카랑카랑함은 많이 사라졌다. 술과 담배를 지나치게 즐긴 탓. 제대로 관리를 하면(?) 나이 들어서도 이얀 길런, 로니 제임스 디오, 클라우스 마이네는 젊은 시절 못지 않은 기염을 토해내지 않는가! 세월의 무게를 걷어버릴 순 없다고 치더라도 로버트 플랜트처럼 한 순간에 추락하진 않는다. 이십대말에 이른 비틀즈 멤버의 모습을 보면 세월의 흔적을 속일 수 없다. 존보다 세 살 아래인 조지와 존과 동갑이나 워낙 동안인 링고는 나잇살이 덜 들어보이는데, 존보다 한 살 아래인 폴과 존은 눈에 띄게 달라보인다. 나이에 비해 노숙해보이는 존의 경우가 더더욱 그렇다. 삼십이 채 되기도 전에 노인 풍모가 돼버렸다. 이쯤되면 비틀즈 음악이 완성을 지나 하강곡선을 긋기 시작한다. 제각기 결혼도 하고 명성과 부는 최고조에 이른다. 한편 창조성과 영감은 내리 뒷걸음질친다. 66년 여름 이전의 실황에서 느껴지는 정열은 간데 없고 권태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연주에 즐거움이 없다. 억지춘향이 된 비틀즈는 이제 불화가 아니어도 존재감이 상실되었다. 바로 끝이 보인다. 권태기에 접어든 연인의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습관적으로 만나고 사랑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 앞날이 없는. 멤버 각자 앞다투어 자신의 세계를 추구한답시고 솔로의 길을 가지만 넷이 합쳐 만들어낸 전설을 되살린 수는 없다. 솔로 활동에서 보여준 각자의 음악세계는 그야말로 실망스럽다. 인도음악에 심취해 나름 신비로움이 배어들어 깊이가 느껴지는 조지 해리슨의 경우는 따로 치더라도, 폴과 존의 경우 새로움보다는 편안함을 신선함보다는 익숙한 쪽으로 흘러간다. 비틀즈의 전설을 등에 업고 상업적으로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긴 해도 음악성은 뒷걸음질쳤다고 보아야 옳다.
클라우스 마이네의 목소리에는 이글대는 태양열이 스며있다. 음색이 맑고 따뜻하며 경쾌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현란한 동작과 대번에 가슴을 확 뚫어주는 시원한 목소리로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간다. 블랙 사바쓰의 오지 오스본은 반복적인 멜로디를 타고 강령술사 같은 목소리로 머리를 발작적으로 뒤흔들며 주술의 세계로 데려다준다. 로버트 플랜트는 배꼽을 드러내고 교태섞인 동작으로 생리현상을 불러일으킬 듯한 음색과 창법으로 청중들을 흥분시킨다. 이얀 길런이나 로니 제임스 디오는 불을 뿜듯한 창법으로 감동과 흥분의 분위기를 달궈낸다. 한편 핑크 플로이드의 데이비드 길모어는 평탄하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 신비의 경지로 이끈다.
통통 튀는 새로운 멜로디에 빠른 템포, 단순한 리듬과 비트 강한 음악으로 실신지경으로 몰고가는 초기 비틀즈의 노래는 그야말로 새로운 현상이었다. 비틀즈 마니아들은 비틀즈의 등장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만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들 한다. 대표적인 예는 뉴욕 출신의 빌리 조엘로 비틀즈가 처음으로 뉴욕에 도착했을 때 열네 살이었다. 미국은 비틀즈의 첫 방문 몇 달 전에 케네니의 암살 사건으로 슬픔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에너지 넘치고 발랄한 이십대 초반의 네 청년의 출현은 이 슬픔을 가라앉게 해준다. 새로운 머리 스타일과 참신한 복장, 그리고 인터뷰에서 보여준 자유분방함과 유머감각, 새로운 무대매너, 그 무엇보다 흥겹고 새로운 록 멜로디는 팬들을 열광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바꿔놓기에 이른다. 비틀즈 이전에 대중음악이 사람들한테 이렇게 큰 영향력을 끼친 적이 없었다. 비틀즈의 선풍적인 인기는 말 그대로 하나의 문화현상이 된다. 억눌렸던 젊은이들의 욕망을 이끌어내 분출시킨 기폭제였다. 그야말로 시대 분위기를 잘 표현한 현대적인 음악이다. 몇 십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옛날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한 시대를 주름잡은 카펜터스나 아바의 음악은 쉽게 칠팔십년대로 되돌려 놓는다. 반면 비틀즈 음악은 굳이 육십년대에 얽매이지 않는다. 비단 나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 터. 그들은 여전히 새로이 젊은 팬을 거느리고 있으니까. 지금도 열 개가 훨씬 넘는 짝퉁 비틀즈 밴드가 활약 중이다.
어떤 음악이 그림이 문학작품이 단지 그 시대에 인기를 누렸다고 훌륭한 작품은 절대 아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아야 고전이다. 이런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늘 현대성과 보편성을 띤다. 다시 들어도 다시 보아도 다시 읽어도 고정된 느낌이나 이미지를 주는 게 아니라 늘 새롭게 다가온다. 우선 작품은 자기 시대를 잘 담아내야 한다. 동시에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한다. 결국 현대성과 보편성을 두루 갖추어야 된다.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고 살아남는 작품은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음악은 이제 듣는 게 아니다. 보는 거다. 기계와 인간이 적절하게 뒤섞여 소리가 나온다. 저 소리는 과연 인간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기계가 내는 소리인가? 기계로 믹싱한 목소리는 정말 인간적인가, 기계적인가? 노래가 주는 최고의 감동은 가수의 목소리인데, 하긴 변조된 음성도 목소리는 맞다. 어느 순간이 되면 자연의 목소리는 컴퓨터로 합성한 소리가 되어 나온다. 이런 음악에 익숙하면 모든 목소리가 이런가 보다 하고 여길 테다. 아마도 인간의 자연스런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와 결합하지 않으면 감동이 없나 보다. 그러면 저 목소리의 정체성은 뭐라고 보아야 하나. 가수에 온전히 속한 걸까? 기계와 합작한 거라고 여겨야 하나? 진정 변조되지 않은 목소리는 팬들을 끌어모으지 못하는가? 유튜브의 조회 횟수가 인기를 판가름하는 시대에 그 형편없는 음질에 장면전환이 무척 빨라 눈을 뗄 수 없도록 하는 요란한 비디오를 보며 음악을 듣는다. 듣는 걸까? 보는 걸까? 아님 그 중간인가?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닌 것이 음악인가?
성량이 부족해 엠프로 키우고 음이 높이 올라 가지 않아 가성으로 부르는 것까지는 괜찮다. 이젠 저 가수의 진짜 목소리가 어떤 것인가는 모른 채 그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밴드의 사운드도 가수의 목소리도 다 컴퓨터로 만든다. 좀 더 나은 목소리와 이미지를 보여주려면 당연히 기술의 힘을 빌어야 한다. 불행히도 그러는 과정에서 주체인 인간의 자리는 점점 쪼그라든다. 기계가 내는 듯한 가성에 춤곡풍의 빠르게 반복되는 멜로디가 돋보이고 효과음과 코러스가 가수 목소리에 버금간다. 옛 세대인 내가 듣기엔 이런 노래엔 가수의 혼이 실리지 않은 느낌이다. 노래를 하는 건지 춤을 추려는 건지 알 수 없다. 벌떼춤을 추며 돌림노래 처럼 코러스가 리더싱어 못지 않다. Taylor Swift, Beyoncé, K-pop 걸그룹… 한 마디로 ‘새로움’도 감동도 없다. 유투브를 통해 요즘 뜨는 가수의 뮤직 비디오를 보며 씁쓸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뮤직 비디오를 보지 않고 음악을 듣던 시절 목소리가 모든 감동의 원천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수의 생김새는 관심이 덜했다. 텔레비전이나 뮤직 비디오를 보며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수의 생김새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목소리는 주옥 같은데 얼굴은 완전 아니올시다 이거나 얼굴은 참 잘 생겼는데 목소리가 제대로 터져 나오지 않고 앵앵거리는 가수도 많다. 뭐니뭐니 해도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야 훌륭한 가수다. 비디오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면서 어쩔 수 없이 가수의 생김새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이젠 듣는 가수에서 보여주는 가수로 변하고 말았다. 요즘이야 유투브를 통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국내 가수야 텔레비전에서 쉽게 얼굴을 접할 수 있어도 외국 가수의 경우 실물 보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수의 모습이라야 앨범 자켓의 사진이나 팝송책에 실린 화보가 전부였다. 목소리만 듣고 좋아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화면으로 실물을 보았을 때 상상했던 이미지와 달라 실망할 때가 더러 생긴다.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얼굴은 전혀 아니다! 둘 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그런 경우는 참 드물다. 인물도 좋고 목소리도 아름답다면 하늘이 내린 선물!! 젊을 때 괜찮다가 나이 들면서 곱게 늙지 못하고 추하게 추락하는 수도 많다. 한창 시절 고왔던 얼굴이 폭삭하고 매력적이던 목소리가 맛이 가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요란한 몸 놀림과 정열적인 창법을 구사하는 롤링스톤즈의 가수 믹 재거는 생김새가 볼품이 없다. 영혼을 불사르는 열창 가수 자크 브렐 역시 인물은 별로다. 마찬가지로 대단한 가창력을 자랑하는 에디트 피아프도 자그마한 체구에 그리 아름다운 용모는 아니다. 이 세 사람 모두 뛰어난 가창력이 밑받침된 대표적인 가수들이다. 섬세하며 세련된 음색으로 관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자지는 여전사를 떠올릴 만큼 건장한 육상선수의 몸을 보여준다. 황홀하게 감미로운 목소리를 타고난 카렌 카펜터의 용모도 그냥 수더분하다. 리듬앤블루스의 디바 와인하우스도 목소리와 가창력은 가히 신이 내린 것이라고 보아야겠지만 생김새는 마약과 알콜로 몸이 망가진 다음에는 보기 안스럽다. 디스코 시절의 팝스타 올리비아 뉴턴존은 얼굴과 목소리가 매력적이어도 성량이 부족한 비디오형 가수다. 한편, 포크송계의 큰 별인 형제 두엣 에벌리 부라더스는 둘 다 깎은 밤톨 같은 용모에 음성 역시 참 감미롭기 그지없다. 이브 몽탕도 훨친한 용모에 노래도 잘 하는 가수 겸 배우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둘 다 갖춘 대단한 가수다. 최근에는 가수의 생김새가 목소리보다 앞선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가수들이 다 잘 생겼다. 라디오형 가수가 아니라 비디오형 가수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자주 옛일을 떠올린다. 청각을 타고 들어오는 기억은 거의 생리적이어서 그 반응은 정말 강력하다. 그 음악 듣던 시절이 거짓말 같이 되살아온다. 덩달아 음악에 얽인 일이며 인물들이 줄줄이 엮여나온다. Those were the days, Yesterday, All those years ago, Yesterday once more,The young ones, Mrs Robinson...
어느 봄날 대학 기숙사 휴게실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재결합 공연을 지켜보았다. 카셋트 테입 표지 화면으로 보던 가수들을 현장은 아니어도 실황 화면으로 보다니… 무엇보다 결별한 두엣이 다시 모였다는데 더 많은 팬들이 열광했을지 모른다. 트윈폴리오의 해체나 그보다 한참 전 일어난 비틀즈의 해체에 못내 아쉬워하던 나였다. 벌떼 같이 모인 센트럴파크의 관중만은 못해도 참 많은 학생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1지망에 떨어져 2지망 과에 등록해 재수를 노리며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던 시절이었다. 갈피잡지 못하고 헤매던 때 잠시 모든 시름을 잠재워준 신선한 샘물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 방에서 재홍이 기타를 치며 [해바리기]의 노래를 불렀다. “어서 말을 해.”, “사랑이야”... 기타도 그런대로 퉁기고 성량이 좀 작기는 해도 들을 만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런대로 잘 불렀다. 당시 재홍은 갓사귄 여자 친구와 한창 잘 나가던 때였다. 내가 4학년 때 약대 대학원생 삼수 형이 졸업을 한 뒤로 룸메이트가 바뀌었다. 부산 출신의 물리학과 친구 « 대화 학생 ». 충남 대천 사람 하숙집 아주머니가 « 대화 학생, 밥먹어유. »하는 소리가 귀에 맴돈다. 사람 좋은 삼수 형보다는 못해도 그런대로 무던했다. 음악을 좋아해서 오디오를 갖고 있었다. 클래식 레코드와 퀸의 앨범이 주를 이루었다. 대화 녀석의 오디오 덕분에 난 오디오도 없으면서 음반을 몇 장 구입했다. 모노로 녹음된 파블로 카잘스 연주의 무반주 첼로조곡, 관능적인 목소리를 자랑하는 마리 라포레 선곡집, Moonlight shadow가 수록된 마이크 올드필드의 레코드... 우리 방 방바닥엔 일본 배우들의 알몸 화보가 실린 잡지, 김홍신의 [인간시장], 그리고 가요집도 몇 권 나딩굴었다. 우리 방이 중앙에 있고 가장 큰 방이어서 그랬는지 하숙생들은 우리 방 맞은편 식당을 왔다 갔다하면서 반드시 우리 방을 흘깃흘깃했다. 무슨 건수가 없나 하고... 하숙집 친구들은 나더러 "총재"라고 불렀다. 걸핏하면 내가 내뱉는 소리는 큰 목소리로 “먹자! 자자! 나가!”를 외치며 “재미추구”와 “귀족적 품위”를 떠벌여서이다. 민주재미추구당 총재. 이게 하숙집에서 날 부르는 공식 호칭이었다. 재홍은 이걸 줄여 민재추 총재, 다른 친구들은 더 줄여 총재하고 부르곤 했다. 또 다른 내 구호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자!"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나란 위인이 외마디처럼 외치는 소리가 주로 이것밖에 없었으니...
뮤직 비디오와 함께 음악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 같은 노래의 여러 버전을 보면 연령대에 따라 변하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새파랗게 젊은 이얀 길런이 탄력넘치는 몸매에 폼나게 입고,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바람잡는 로저 글로버 옆에서 표효하는 모습을 보다가 하얀 머리의 칠십대가 된 이얀 길런이 여전히 로저 글로브 옆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친다. 어떤 때는 노란 티나 흰 셔츠에 청바지를 어떤 때는 가죽옷을 입고 어떤 때는 하얀 정장차림으로 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던 이얀 길런. 도사 같은 풍모를 풍기는 전설적인 키보드주자 존 로드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 깐깐하고 까다로워 보이는 리치 블랙모어는 디퍼플을 떠나 오랜 전에 레인보우를 만들었다. 그 호리호리하며 날카로운 영원한 반항아 리치 블랙모어도 오십대에 이르면 벌써 둥글넓적해진다. 전설적인 디퍼플의 라인업은 뭐니뭐니해도 리치 블랙모어가 있어야 제격! 다른 단원보다 비교적 젊은 디퍼플의 리더기타 스티브 모스는 뭔지 모르게 어색하다. 이얀 페이스는 웃통을 벌거벗고 신들린듯 드럼을 두드린다. 존 로드는 몇 대의 키보드를 오가며 환상의 멜로디를 이끈다. 로저 글로버는 으레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베이스기타를 퉁기며 흥겹게 무대를 누빈다. 리치 블랙모어는 가슴 파헤쳐진 까만 옷을 입고 언제나 무표정하게 제자리에 박힌 채 리더기타를 친다. 이얀 길런은 둥둥해지고 얼굴선이 맛이 가도 여전히 근육질을 자랑하며 약간 느린 템포로 노래한다. 세월이 흘러 이얀 길런의 성량과 힘이 줄어든 대신 엠프 기능이 눈에 띄게 나아져 밴드의 사운드는 오히려 더 웅장하고 강력해졌다. 사운드가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졌지만 한창 때의 팽팽한 긴장감과 섬세한 맛은 떨어진다. Child in time, Perfect stranger, Strange kind of woman, Highway star, Speed king, Woman from Tokyo...
대학시절 ‘신한다방’에서 J와 둘이서 누구의 신청곡이 먼저 나오나 내기할 때 단골메뉴 가운데 비틀즈는 물론이고 디퍼플, 레인보우, 핑크 플로이드, 산타나 등의 곡이 꼭 들어있었다. Soldier of fortune, Smoke on the water, Catch the rainbow, Rainbow eyes, Time, Money, Europa, Samba pa'Ti...
음악을 들으면 절로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장소를 이동하는 여행이 아닌 시간여행이다. 그렇다고 그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는 여행은 아니다. 과거를 현재로 감쪽같이 되살려 놓는 마술여행이다. 이리하여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고 벅찬 감동을 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를 귀신처럼 현재에 되살리는 탁월한 촉매다.
한 동안 난 음악을 들어야 잠들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카셋트 하나를 들으며 잠들곤 하였다. 음악을 켜두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것 같은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마약에 길들여진 중독자처럼 음악을 들어야 잠에 빠져들곤 하였다. 카셋트가 한 바퀴 돌아가는 중에 잠이 들거나 한 바퀴 더 돌리는 때도 있었다. 약 기운이 적당히 퍼져나가야 잠이 오는 현상은 과연 뭐라고 해야 하나. 머리맡에 카셋트를 두고 누워 카셋트 돌아가는 소리가 섞여나오는 음악을 듣고서야 잠에 빠져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색으로 치면 렘브란트 그림에서 명암의 스펙트럼 효과로 어둠을 통해 한층 더 돋보이는 빛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이런 거다. 시험공부할 때도 음악을 듣고, 텔레비젼 스포츠 중계를 동시에 보았다. 한 눈으로 책을 한 눈으로 화면 귀로는 음악을 들었다. 학생수첩 곳곳에 맘에 드는 노래 제목이며 가수와 연주자의 이름을 적어두었다. 주로 에프엠을 통해 팝송을 듣던 시절이었다.
이런 멜로만적인 생활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가져다 주는 선물이다. 특히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안 되는 일. 너무 슬프거나 극히 고통스런 일을 당하면 그 좋아하는 음악도 들을 수 없다! 그래도 슬플 때는 오히려 흥겨운 음악을 듣는 편이 낫다. 나는 한 동안 음악을 거의 듣지 않고 지냈다. 어쩌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여름철에 집중하여 들었던 걸 빼면 음악과는 담을 쌓다시피했다. 혼자 있고 피곤해서 공부를 하기엔 집중력이 모자랄 때 음악을 들었다. 에프엠을 통해 방송을 듣거나 CD를 들었다. 에프엠은 유행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옛날 노래도 많이 들려준다. 언제부터인가 유행에 덤덤해지면서 유행하는 노래보다는 예전에 좋아하던 노래쪽으로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유행에 심드렁해진 탓도 크고 나이가 들어서 그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유행하는 노래를 전혀 안 듣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지난 시절에 좋아한 명곡들을 주로 듣는다. 그래서 팬들도 가수와 함께 나이들어간다. 세대별로 애창곡이 구분된다. 이러고 보면 사람이 자기 세대를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 듣는 음악이라곤 젊은 시절 즐겨듣던 걸 되풀이해서 듣고 있으니...
이제 나란 사람도 무대전면에서 차츰차츰 뒤로 물러나는 세대가 되었다. 언젠가 퇴장 당하는 날이 오리라.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서글퍼지기 전에 공연히 초조해진다. 초조함과 조급함 이 둘은 한창 젊은 시절부터 나를 괴롭히던 녀석들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젠 으젓한 동반자가 된 듯도 하고 이 놈들을 떠올리면 괜히 신경이 곤두서며 짜증이 난다. 이런 심정이 들 때는 아무 생각없이 콧소리로 흥얼거리며 좋아하는 노래를 듣자. 라라랄라라 랄랄라, 예예예예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