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8.02.23) 시간을 떼울 양으로 정말 오랜만에 프낙을 들렀다. 딱히 살 책이 있어서가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극도로 나빠진 상태라 사고 싶어도 못 사는 형편이니. 그래도 무슨 호기를 부린다고 최근에 개발한 단골 프랑스 식당에서 본식에 백포도주 한 잔 커피까지 마시고 나온 터다! 아무리 계산해도 2월 수입으로는 집세며 주택부금을 감당할 수 없다. 게다가 런던 여행비는 과외로 나가야 하는데... 잠시 후에 여행사 사무실에 들러면 가이드비를 깎자고 나올테고.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이미 가까워진 레알로 걸어갔다. 런던 상세 지도를 한 장 사나? 르몽드에서 소개된 책 소개 기사를 인쇄해 들고 다니는데 이 책을 한 권 사볼까? 우파 논객 세 사람이 리버럴리슴 정책을 우려하는 에세이라는데... 프낙은 서점이면서 흑색 가전제품 종합판매점이다. 텔레비전, 오디오, 사진기, 컴퓨터와 관련 악세사리를 파는 가게다. 그 가운데 서점도 큰 몫을 차지한다. 학위를 마치고 문학관련 책을 사러 가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주로 루브르 미술전문 책방에서 미술책만 줄곧 사들인다. 사들인 책은 안 읽은 게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읽지 않은 게 아니라 읽다가 그만두었다고 해야겠다. 어쩌다가 종합 서점을 지나치다가 새로 쏟아져 나온 소설을 볼 때면 숨막힐 듯한 아득함이 몰려든다. 소설을 잘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이젠 전공이 문학에서 미술로 바뀌고 말았다. 맨날 읽는 책이 미술책이니...
정말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정치 관련 코너에서 르몽드에 소개된 책들을 찾아 훑어보았다. 두 권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했다. 우선 보기에 깊이가 없어보였다. 에세이지 않은가? 마지막에 찾은 알랭 맹크(Alain Minc)의 책만 약간 관심을 끌만했다. 2백 쪽도 되지 않는 분량인데 가격이 18유로다. 그까짓 정치평론집이 이렇게 세나! 살 마음이 바로 사라졌다. 사더라도 영국 여행 다녀와서 사자. 사 보아야 읽을 시간도 없잖은가. 에라 내친 김에 철학 코너나 한 번 둘러볼까. 철학책도 내가 거의 읽지 않은 분야기는 마찬가지. 그래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하는데는 정치나 경제보다 철학을 통하는 게 낫지 않을까.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자들만 판치는 세상이니... 온통 마크롱 천지다! 지식인들은 다 어디가서 얼어죽었을까? 병신 쪼다로 화석이 되었나?
그러다가 내 눈이 번쩍 뜨이는 제목을 발견했다. «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기 ». 이게 한때 내 금언이지 않았나! 다른 분야면 몰라도 이 분야 만큼은 나도 대단한 인물이지. 암, 그렇고 말고!
분량도 길지 않고 가격도 싸다. 미국 철학자의 번역서였다. 몇 번 훑어보다 사기로 결심했다. 양이 많지 않으니 금방 읽을 거야(121쪽이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다. 이 책 읽다 그만 두고 저 책 한 지 얼마던가! 스무 권은 족히 넘을 테다. 읽다가 그만 두고 또 딴 책을 읽다 보니 쌓아둔 책만 몇 권인지... 그렇다고 내가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집중해서 같은 책을 꾸준히 독파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래도 꾸준히 이 책 저 책을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 몇 페이지를 미친 듯 읽다가 관두고 런던 가이드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런던 출발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두 권 사둔 가이드북은 앞만 몇 페이지 읽다 덮어둔 상태다. 리버풀 가이드북은 아예 흘긋 하고 덮고 말았다. 물론 그 사이 미술책은 여러 권 해치웠다. 오랑주리 방문한다고 어쩔 수 없이 새로 사들인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에 루브르 서점에서 사들인 오르세 걸작품 관련 책은 완독은 아니더라도 상당 분량을 읽어내었다. 그러다가 런던 가이드북으로 넘어갔다.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산 «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기 »는 역시 이 책 제목대로 스무 쪽 읽다가 중단했다. 의욕차게 시작은 했지만 언제 맺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런던 출발이 코 앞으로 다가 왔는데 또 예기치 않은 불미스런 일이 터지고 말았다. 런던 가이드북도 중지다. 그래도 런던 출발은 연기할 수 없다. 기차표가 오래 전에 예매했고 호텔도 예약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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