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보아야 하는 파리의 명소

발자크의 집

파샤 (pacha) 2015. 3. 22. 06:44

작가가 7년(1840-1847) 동안 세들어 살았던 발자크의 집. 발자크가 살았던 집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다섯 칸짜리 아파트는 식당, 거실, 침실, 침실에 딸린 작업실, 지하실로 구성되고 정원이 있다. 가파른 파시(Passy)동네의 언덕에 자리잡은 구체제(Ancien Régime) 시절의 건축물로 원래는 화려한 저택의 부속건물이었다. 파시 마을은 1860년에 파리시에 편입되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급 저택들이 즐비한 멋진 지역으로 변한다.

 

빚쟁이들을 피해 브뢰뇰 씨(M. de Breugnol)라는 가명으로 숨어 산다. 그래서 그의 집에 들어가려면 암호가 필요했다. 빚쟁이가 들이닥치면 발자크는 입구와 반대편 길로 달아났다고 한다.

 

1949년 파리시에서 구입하여 박물관과 도서관(15000 점의 문헌 소장)으로 만든다. 도서관에는 초판본, 육필원고, 발자크가 인쇄한 책들, 신문, 삽화 등을 보관하고 있다. 도서관에는 작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관련 자료도 보유하고 있다. 고티에는 발자크의 집을 자유롭게 드나들던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 

 

 

 

사진 맨 오른쪽이 그의 집필실이다. 이 집에서 그는 [가재잡는 여인], [궁녀들의 영광과 비참], [사촌 누이 베트], [사촌 형 퐁스] 등을 쓴다. [인간희극] 전체의 교정을 본다. 박물관에 [인간희극]에 나오는 등장인물 1000명의 가계도가 6미터짜리 그림으로 제작되어 있다.

 

 

정원 구석에 놓인 발자크의 흉상. 저 고요한 정원 한켠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수도사 복장으로 포도넝쿨을 따라 걸으면서 17년간(1832-1848) 연애편지로 사귄 마담 한스카(Eve Hanska : 1805(6)-1882) 부인한테 보낼 장미꽃이나 제비꽃을 따는 발자크를 떠올려 볼 일이다. 한스카 부인은 폴란드 귀족과 결혼한 여인이었는데, 1841년에 과부가 된다. 발자크가 죽기 다섯 달 전인 1850년 3월에 발자크와 결혼한다. 물론 발자크와 한스카 부인은 결혼 전에 여러 차례 만나 정을 나눈다.

 

 

다비드 앙제가 1844년에 발자크한테 헌정한 흉상. 제2의 시선, 견자의 시선을 가진 발자크의 눈을 보라. 소설가-철학자를 자처한 발자크는 스웨덴보르그, 야콥 뵘, 생마르탱 등의 신비주의에 심취해 [루이 랑베르], [세라피타], [추방자], [코르넬리우스 대감], [불로장생액] 등을 쓴다.

 

 

발자크가 쓰던 책상. 호두나무로 만든 16세기적 가구. 정말 소박하다.

"매일 밤 자정에 일어나 여덟 시까지 글을 쓰고, 15분 만에 점심을 먹고는 다섯 시까지 일하고,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빅토르 다르고(Victor Dargaud)가 그린 포르튀네(Fortunée)가(현 발자크가)의 저택, 1889. 발자크는 이 저택을 1848년 9월에 구입한 뒤 공들이고 정성들여 장식한다.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가 죽은 다음 이 저택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녀가 죽은 지 몇 년 뒤 이 저택은 헐린다.

 

 

포르튀네가의 저택의 문짝.

 

 

 

발자크가 1844년에 150프랑 주고 사들인 목조 예수상. 부샤르동(Bouchardon)이나 지라르동(Girardon)의 작품으로 본다.

 

 

로댕이 발자크 상을 제작하기 위해 만든 잠옷, 1897. 

발자크는 저런 잠옷을 입고 잠을 좇으려고 하루에 커피 수십 잔을 마시며 도형수처럼 글을 썼다. 인쇄사업에서 실패하여 빚을 지게 되자 빚갚기 위해 써댄 작품들이 우리가 아는 [인간희극]이라고 한다면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 집에 살던 시절에도 빚쟁이한테 시달리며 살았는데, 빚쟁이가 들이닥치면 달아날 출구를 따로 마련해두고 있었다.

 

 

[상어가죽] 판본을 위한 도장.

 

 

장 콕도가 그린 발자크의 초상, 1948. 종이에 먹.

 

 

피카소의 석판 초상, [발자크의 초상 VIII],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