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

신고전주의 회화

파샤 (pacha) 2012. 4. 17. 23:14

[호라티우스의 맹세]. 

'신고전주의의 선언'으로 알려진 작품으로 결투에 떠나는 세 아들한테 칼을 나눠주는 호라티우스. 오른쪽의 여인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로 기댄 채 눈물을 흘린다. 남자들의 팔, 다리, 창, 칼에서 직선으로 여자들은 곡선으로 나타난다. 배경의 도리아식 기둥이며 바닥에 늘어지는 그림자 효과까지 아주 정교하게 재현해낸다. 이런 현실감을 주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왼쪽에서 조명을 비춘다. 단순한 직선과 곡선, 제한된 색을 통해 감정표현을 극도로 절제한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다는 전체를 위한 조국애를 앞세우는 미덕이 주제로 등장한 신고전주의 걸작. 

이 작품은 작가가 볼테르의 연극 [호라티우스]를 보고 영감을 얻는다. 이런 경우 그림으로 그릴 때 어떤 장면을 택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사비나의 여인들], 1799. 

로마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비나와 평화를 이룩하는 극적인 모습을 형상화. 

로마 건국 시절의 일화로 여자들이 절대 부족했던 로마는 이웃 국가인 사비나한테 결혼할 여자들을 보낼 것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로마의 우두머리 로물루스가 크게 잔치를 열어 사비나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고는 사비나의 여인들을 차지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치욕을 앙갚음하려고 사비나의 수장 타티우스는 3년 동안 로마와 전쟁을 벌인다. 이미 로마인의 어머니가 된 사비나의 여인들이 앞장 서 아이들을 전장 안으로 밀어넣고는 전투를 가로막는다. 한 가운데 헤르실리에가 오른쪽의 남편 루물루스와 왼쪽의 아버지 타티우스를 저지한다. 

이 작품은 니콜라 푸생의 [사비나 여인들의 납치](1637-1638)의 후속작으로 읽을 수 있다. "푸생의 고전주의"를 볼 것.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인 조각에 드러난 나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뒤 가까스로 단두대를 모면한 다비드가 프랑스 대혁명 중 공화국의 시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공화파의 대화합을 추구하는 주제다.

화면 아래 가운데를 차지한 아이들의 시선을 보라. 정면을 직시할 수 있는 인물은 순진무구한 아이들 뿐이다. 또한 아이들의 호소가 가장 호소력이 강한가.

남성의 섹스를 가리는 교묘한 처리를 보라. 분명 사건의 현장은 로마지만 이 그림의 배경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성이 바로 앙부아즈다. 원형의 성탑과 낭떠러지 지형이 닮았다.


자크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1808). 979*621. 1804년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주문 제작. 이런 그림을 역사화라고 부른다. 191명의 인물 중 164명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으니 단체 초상화라고 하면 좋겠다. 단체 초상화라면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하였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갹출하여 단체초상화를 주문하였다. 돈 많이 낸 사람은 가운데 번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덜 낸 사람은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대표로 렘브란트의 [야경순찰대]를 떠올릴 수 있다.


다비드는 베로네제의 [가나의 혼례잔치]보다 더 크게 그렸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베로네제의 작품이 가로 15, 세로 56센티가 더 크다. 십가가 뒤쪽의 기욤 쿠스투의 피에타는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그대로 있다. 베르사유의 나폴레옹 기념관에도 거의 똑같은 그림이 걸려 있다. 다비드가 1808년 파리에서 시작해 1822년 브뤼셀에서 완성한 작품으로 루브르의 작품에 비해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 루브르의 원작에 비해 가로 세로 10여 센티가 작다. 인물 구성이 원작과 약간 다르고 같은 인물이라도 얼굴을 바꾼 경우도 많다.


다비드가 처음 생각한 나폴레옹의 자세는 오른손으로 관을 들어 스스로 쓰는 동작에 왼손으로 칼을 가슴에 갖다 대는 아주 대담한 포즈였다. 이게 기사도의 자세로 조제핀한테 주는 자세로 바뀐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관을 들어 자기 머리에 살짝 얹은 다음 부인의 머리에 씌워준다. 현재 조제핀은 41세, 나폴레옹은 35세다.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자 찬미자인 다비드는 루이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회 의원으로 가운데 둘째 계단에서 왼쪽 둘째 줄에서 화판을 든 두 번째 인물이 화가 자신이다. 화가 왼쪽이 제자며 조수였던 루제(Rouget), 앞줄의 모자 크게 쓴 화가의 부인 양쪽은 그의 쌍둥이 두 딸들이다. 오른쪽 딸 바로 옆은 노트르담 성당 모형에 인형을 만들어 인물배치의 현장감을 재현하는 일을 맡은 여제자 몽제 부인(Mme Mongez), 그 옆이 다비드의 스승 비앵(Vien). 이 줄의 남자들은 모두 가슴에 빨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차고 있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청을 네 번이나 거절한다. 나폴레옹이 다비드한테 종군 화가가 되어 줄 수 없느냐고 요청했을 때 두 번, 문화부에 직책을 주고서 일하기를 제안했을 때도 두 번 거절한다. 종군 화가로는 다비드의 제자 그로(Gros)가 맡게 된다.


나폴레옹은 형이 한 명, 남동생 셋, 여동생 셋. 왼쪽 화면 앞줄이 나폴레옹의 가족으로 세 번째 여자까지. 왼쪽에서 첫 번째가 나폴리왕이 되는 뮈라 장군(조제핀 바로 뒤에 손에 방석을 들고 서 있다)의 부인 카롤린. 네 번째가 제수(동시에 조제핀 딸이다), 다섯 번째는 형수. 첫째 계단 가운데 인물이 참가하지 않은 두 남동생을 두둔하여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려넣은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시아.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 조제핀(그림에서 41세)은 남매를 둔 재혼녀로 나폴레옹(35세)보다 여섯 살 위다. 왼쪽 화면 넷째 여자가 조제핀의 딸이며 오른쪽 화면 끝에 맨머리의 젊은 청년이 아들이다. 오른쪽의 맨 앞줄의 끝에 있는 붉은 옷 차림의 인물은 루이15세부터 루이필립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중심부를 주름잡던 탈레랑 장관. 특히 권력의 기생 탈레랑은 화가 들라크루아의 진짜 아버지라는 설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제의 관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지만, 맨 오른쪽에 자리잡은 두 아이는 앞에 놓인 칼에 박힌 보석이 신기해서 그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밝기 조절을 통해 등장 인물을 부각시키는 놀라운 재주를 보라.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처럼 멋진 연출을 해내고 있다.


빛에 따라 작품은 이렇게 달라진다. 루브르는 조명 상태가 썩 좋은 미술관이 아니다. 청명한 날 루브르를 방문할 일이다.



교황 바로 왼쪽 추기경은 식 당일 감기로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려넣었다.


반면, 교황 오른쪽에 화려하게 잘 차려 입은 네 명은 장관, 원수들인데 이 줄에서는 두 명을 빼버렸다. 교황에 반대되는 사상을 가졌다고... 맨 오른쪽에 붉은 옷을 걸친 이가 탈레랑 장관이다.


자크루이 다비드, [레카미에 부인], 1800. 미완성 걸작.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같은 관제화가 아닌 이런 인물화에서 다비드는 엄격하고 제한된 구성과 절제된 색채의 구속에서 어느 정도 탈피하여 주관적인 감정 표현을 하기에 이른다. 다비드는 훌륭한 초상을 많이 남긴다. 46세 때의 자화상, 비오7세의 초상, 샤를루이 트뤼덴 부인, 오르빌리에 후작 부인 등.

이 여인의 왼쪽 이마 위의 머리띠를 잘 보라. 배 모양의 침대가 나폴레옹 시절의 유행이었다. 고대풍의 촛대며 여인의 옷복장이 고대풍을 드러낸다. 나폴레옹 시절의 가구를 전시한 곳에 가면 레카미에 부인이 쓴 침대를 볼 수 있다. 34살 위인 부유한 은행가와 결혼한 레카미에 부인은 19세기 초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젊은 귀족들과 교류가 활발했다. 그녀의 영원한 연인은 바로 유명한 문인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미완성과 완성의 개념이 경계를 터기 시작한다. 18세기 말부터 유행한 폐허가 소재로 떠오름에 따라 파편 혹은 부분의 미학이 등장한다. 

다비드를 딱딱하고 정형화된 그림만 그리는 신고전주의에 묶어 설명하면 다비드의 진가를 반은 줄이는 셈.


앵그르, [오달리스크], 1814년작. 터키말로 오달륵(오달리스크)는 황궁의 침종을 뜻하는 말로 보통명사로 고급창녀라는 뜻도 있다. 얼굴은 두말할 나위없이 비너스인데 몸은 어떤가. 인체를 해부학적 비례를 무시하고 왜곡시켜 인공적인 곡선을 만들어낸다. 엿가락 늘어지듯 빠진 팔이며, 등은 비대하게 둥그스럼하고 방댕이는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며 다리는 이상하게 짱달막하다. 또 발바닥은 어떤가. 오른발은 오목한데 왼발은 평발에 가깝다. 게다가 비튼 목은 저렇게 자세를 취한다면 목은 부러지고 말 터이다. 오른쪽 유방의 위치도 떼다 붙인 것처럼 정상적인 위치가 아니다. 그러면 기형 비너스인가? 개성적인 비너스인가? 오달리스크는 형상을 비틀어 반사하는 볼록거울을 보며 그림을 그린 느낌이다. 그도 저도 아니면 화가의 눈이 잘못된 것인가? 인상주의 대표화가 클로드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이 걸린 뒤 그린 그림은 추상에 가깝다. 이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생긴 현상에 가깝지만 이런 기형을 만들어낸 앵그르의 눈은 과연 어땠길래 이런 형태를 만들어냈을까?

이렇게 해서 막강한 고전주의의 미학이 서서히 물러나게 된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서서히 주관적으로 바뀌어 가는 모습을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앵그르, [베르탱 씨의 초상]. 베르탱 씨는 유명한 신문 [토론]지의 사장으로 싼 가격으로 신문을 보급하여 돈을 많이 번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 조끼의 단추가 터질듯이 나온 배며 자신만만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보이는 얼굴 표정에서 출세한 새시대의 주인공을 만나는 듯하다. 

베르탱씨와 친분이 두터웠던 앵그르가 초상 주문을 받고도 마땅한 포즈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느 날 베르탱씨가 자기 아들과 토론 중인 모습에서 이 초상의 자세를 찾았다고 한다. 두 손가락을 허벅지에 곶추 세운 모습은 마치 장닭이 싸움에 나서기 전 도가머리를 들고 돌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강줄기가 갈라지는 듯한 머리칼에서도 무언가 강한 기를 느낄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 윤택해져 부르주아가 된 베르탱씨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포즈를 보라. 이게 바로 역사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의 초상이다. 

플랑드르 화가들이 즐겨 쓰던 오목 거울로 바깥을 보여주는 기법을 허리띠의 바클과 의자의 팔걸이 앞쪽에서 쓰고 있다. 배경에서 벽면 아래쪽을 격자로 처리한 것은 현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 가운데 하나다. 일테면 베르탱 씨의 집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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