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통털어 남아 있는 다빈치의 회화 작품은 고작 열 서너 점이다. 그 가운데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최후의 만찬]은 벽화이다. 루브르에는 [모나리자]말고도 그랑 갤러리에 다른 네 점의 다빈치 작품이 걸려있다. 네 점과 연달아 전시된 [바커스]는 제자들의 작품이다. 그래픽 전시실에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프로필 데생이 소장되어 있다. 만토바 공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는 사신을 통해 여러 차례 다빈치한테 그림을 부탁하였으나 다빈치는 결코 그녀의 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대타로 구한 화가는 누구였을까? 안드레아 만테냐.
[성안나가 있는 성모자상]. 사진은 형편없는 색상이라 작품성을 이야기할 계제가 아니니 원작을 봐야 한다. 전면의 성모의 푸른 치마와 먼 풍경의 푸르스름한 대기의 움직임을 묘사한 배경이 절묘하게 짝을 이루며 근경과 원경의 단절된 선을 너머 공감대를 형성한다. 한편 이 단절된 선은 이승과 저승을 구분짓는 경계선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발가락 부분의 조약돌 묘사는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못해 영롱하지 않은가. 반면 저 멀리 아스라히 사라지는 뒷 풍경은 무한 그리고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배경은 시공간을 초월한 성 가족의 모임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 앞 풍경에서 바위 뒤 오른쪽으로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그 왼쪽으로 실개천에 물이 흐른다. 이렇게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듯 하지만 앞 풍경과 단절된 뒷 풍경은 이상의 세계를 제시한다.
세 사람의 시선은 교묘하게 마주치지 않지만 세 사람의 눈길을 따라 가면 삼각형의 빗변을 만들며 삼대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굳이 종교화라고 보지 않아도 우리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가. 할머니, 어머니, 아들 (손자). 한데 이 그림에서 마리아보다 안나를 더 젊게 그리고 있다. 예수 외할머니의 표정은 그야말로 인생을 달관한 모습이다. "얘야, 너무 걱정해봐야 부질없다. 어쨌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태어난 운명이란다." 마리아는 행여 어린 아들이 다칠까봐 근심어린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기 예수는 아랑곶 않고 어린 양의 귀와 뿔을 부여잡고 장난을 친다.
망사천 사이로 느껴지는 마리아의 오른팔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 같다. 푸른 치맛폭을 찢고 나올 듯한 허벅지의 팽팽함도 그대로 전달된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1499-1500. 윗 그림의 세 번째 판형.
수평 구도를 취한다. 위의 완성판이 훨씬 역동적이다.
[암굴의 성모]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작품은 주문자인 성당 참사회의 보수적인 생각으로 이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아 두 번째 그린 작품으로 루브르의 것보다 훨씬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려진다. 아무튼 다빈치는 곱슬머리를 몹시 좋아한다. 아님 파마협회 회원이었나. 우리엘 천사의 오른손의 집게 동작도 흥미롭지 않은가. 마리아의 손동작을 잘 보라. 세례자 요한은 등을 쓰다듬으며 귀여워해주는 모습이나 자기 아들 위로 왼손을 펼쳐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자태는 어떤 느낌이 드나. 이 작품에서도 인물들은 피라미드적인 역동성이 넘치는 구성을 보여준다.
성모자상에서 마리아는 늘 젊고 예수는 늘 아기로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기 예수와 세례자 요한이 저 어린 나이에 벌써 득도한 자세를 취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런던, 내셔널 갤러리, 1491/2-9, 1506-8.
윗 그림에 비하면 훨씬 딱딱하다. 색 배합도 단순하고 어두운데다 인물이며 배경 묘사에서도 더욱 경직되어 보인다.
[이마에 철보석을 두른 여인] 모델의 주인공은 밀라노 공작(Ludovico Il Moro)의 정부였을 거라고 본다. 배경을 검은 색으로 처리한 게 인물을 부각시킨다. 손을 생략한 초상이다. [모나리자]와 마찬가지로 몸 자세는 사분의 삼 각도에 얼굴은 정면. 창문틀로 인물을 가로막은 건 전통적인 초상의 기법이다.
미켈란젤로의 [노예] 옆 창가쪽에 서 있는 루도비코 일모로의 프로필 부조. 스포르차 가문의 주인공답게 목이 굵고 강건한 무사의 풍모가 느껴진다. 다빈치는 밀라노 공작 밑에서 다양한 일을 맡는다. 밀라노 공작의 죽음은 그한테 후원자가 사라졌다는 걸 의미한다. 든든한 후원자를 찾지 못해 헤매던 중 프랑스에서 온 프랑수아1세를 말년에 프랑스에 오게 된다.
[세례자 요한의 초상] 곱슬머리, 하늘을 찌르는 집게손가락, 야릇한 미소, 남녀양성... 잘 보면 왼손에 들고 있는 십자가가 오른손 왼편으로 보인다. 허리춤에는 모피를 두르고 있다. 극단적인 밝음과 어둠의 대조, 미묘한 단색조를 통해 오묘한 초상의 경지를 이끌어낸다. 이런 걸 두고 사실주의라고 한다면 분명 렘브란트는 다빈치한테서 많은 걸 배웠을 수도 있다.
모나리자를 포함하는 다빈치의 다섯 작품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요소는 역동성 넘치는 피라미드적 구성에 인물의 입가에 보일듯 말듯 엷게 번지는 미소를 꼽을 수 있겠다. 마치 보는 이를 향해 뭐라고 말한 참이다. 관객을 끌어들이는 미소라고 해야겠다. 얇은 입술가로 번지는 미소 띈 표정이 아니라면 인물에 생기가 사라질 터이다. 한데 제각기 그 미소의 의미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성싶다. 특히 세례자 요한이 짓는 미소는 뭐라고 해야 될 지 막막할 따름이다. 오묘한 경지로 이끌고 간다.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세례자 요한의 미소가 더욱 불가사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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