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가 내부 공간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한 폐허다. 파리 올라가는 날이라 반바지 대신 긴바지를 입었는데 내리꽂히는 햇살에 무방비였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 바지 가랭이가 들러붙고 눈부신 햇빛에 금방 피로가 몰려왔다. 이날 프로방스의 태양은 대단했다. 계단이 있어도 암벽 등반을 방불케 하는 코스가 대부분이라 무척 후회했다. 진짜 바위 위 전망대로 올라가다 미끄러져 엎어졌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하마터면 상처를 입을뻔했다. 새로 산 신발이 거덜날 지경이 돼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넓을 줄이야! 길이 900 넓이 200. 바위로 된 암벽 위가 평평한 고원지대를 형성하는데 한 바퀴 훌쩍 돌아보는데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기차 시간이 기다리고 있어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17:19분 출발이라 15:02에 레 보를 지나는 시외버스를 반드시 타야한다. 성을 둘러보고 다시 영화관으로 꾸며둔 채석장 방문이 남아 있다.
여기 저기 중세 무기를 재현해 둔 게 눈길을 끌만하지만 갈 길이 바쁘다. 마지막 날 시간 줄타기는 역시 무모한 짓이다.
중세 때 막강한 영지였던 암벽 위 천연 요새에 지은 난공불락의 성채는 두 차례에 걸쳐 해체되면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왕조나 가문의 몰락은 주변 상황에 좌우되기도 하지만 거의 인재가 불러일으킨다. 아무리 막강한 제국도 폭군이거나 아둔한 황제가 정치를 바로 잡지 못해 권력과 풍습이 타락하면 제풀에 쓰러지고 그 어떤 권문세도가도 가장이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하루 아침에 폭삭한다.
1483년 프로방스에 딸려 프랑스 왕국에 소속이된 레 보 남작령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루이11세가 요새를 파괴시켰다. 1528년 안 드 몽모랑시(Anne de Montmorency) 원수의 봉토가 되면서 성채가 복원되어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그 이후 만빌(Manville) 가문의 차지가 되었을 때 레 보는 신교도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결국 1632년 루이13세 절대왕권의 오른팔 리셜리으(Richelieu) 추기경이 반골기질이 강해 자주 봉기를 일으키는 이 영지의 성과 성벽을 완전히 해체시켰다.
바위 벽 옆구리를 끼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꼭대기가 폐허가 된 성이다.
아랫쪽에서 올려다본 레 보.
가운데 왼쪽 둥근 원통형 건물은 풍찻간이었다.
올해는 아르침볼도의 사계가 폐허를 지킨다. 사진 반대쪽 낭떠러지 가까운 바위에 앉아 가져간 찐 달걀과 복숭아를 먹었다.
사라센 성탑 위에서 내려다 본 폐허 모습.
바로 발 아래 설치된 무기가 성을 파괴시킬 때 쓰는 파성추다.
작은 사회라도 규율을 유지하려면 저런 형벌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범죄와 처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
중세 시절의 무기 제작 재현. 간접화된 공장제품만 쓰는 현대인한테 손으로 직접 만드는 모습은 신선하다.
성채 폐허 난간에서 내려다 본 아랫 계곡의 풍경. 팍팍해보이지만 그래도 살만해 보인다. 올리브와 포도 재배가 주를 이룬다.
지도 상으로는 분명 성채 마을과 붙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어 찾는데 문제 없겠거니 했는데 웬걸 길을 두 번씩이나 물어서 가다 가파른 계단을 다시 올라 삼차로 물은 다음 같은 계단을 다시 걸어내려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사람들인지 채석장 영화관으로 가는 사람들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올라오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결국 쉽게 알아본다는 표지판은 도로 표지판이었다. 당연히 관광지 안내 표지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해 프로그램은 이탈리아 제작진의 작품으로 아르침볼도, 피터 브뤼겔, 제롬 보쉬의 그림을 영화화한 멋진 영화다. 정지 화면이 활동 사진이 되어 살아움직이면서 마술이 펼쳐진다. 브뤼겔의 겨울 풍경화에서 눈이 내리는 효과는 정말 근사하다. 관람자도 영화화면 속으로 들어가면 영화 속의 인물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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