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한데집(새집) 앞 언덕배기에 무더기로 무성하게 자라던 노란꽃 피는 풀이다. 장마가 끝날 무렵 바랭이가 무서운 기세로 자랄 때면 덩달아 꽃피는 풀이다.
고향에서 보던 풀에 비해 훨씬 키작고 볼품없다. 지금에사 그 풀 이름을 알아냈지만 그 때는 이름모를 풀이었다.
줄기를 꺽으면 불그스레한 피고름 같은 게 나오는 풀, 소먹이로도 못쓰던 풀, 그냥 관상용이었나? 무싸리 우거진 옆에 군락을 이뤄 자라던 애기똥풀은 별 소용이 없는 풀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진액이 옷에 묻거나 손이나 종아리에 고름처럼 베던 풀이다. 이제 한데집이 헐린 지 참 오래되었다. 엄마가 돌아가고 두어 해 뒤 딱히 돈 들어올 구멍이 없어지자 아부지가 재정확보를 위해 팔아치우셨다. 마침 정부에서 노인우대한다고 마을마다 노인정을 마련해주는 선심정책의 결과였다. 한데집 터는 배꼽마당과 함께 팔렸다. 아니다 배꼽마당 위를 지키던 엄나무도 덩달아 팔렸다. 겨우내 땔나무 더미가 자리잡던 엄나무 뒤 자투리땅도 팔렸다. 한데집 자리에 노인정이 들어섰다. 이제 노인정을 찾을 노인도 다 사라지고 말았으니 노인정만 쓸쓸히 옛 한데집 자리를 둥그마니 지키겠다. 한데집은 마당이랄 게 없이 바로 언덕이 나왔다. 여름이면 뽕잎 먹는 누에 소리가 가득했다. 명절 때가 가까워지면 막걸리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하고, 콩나물 시루가 들어서고 누룩익는 냄새가 케케했다. 동향인데다 바로 뒤도 언덕으로 반쯤 가려 오후가 시원해서 여름방학 때 낮잠 자거나 배깔고 책읽기가 좋았다. 측간이 달린 창고도 덩달아 팔렸다. 창고와 맞댄 처마 아래 작두간이 있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면 내가 밟고 할매가 짚이나 풀을 썰곤했다. 할매가 풀이나 짚을 먹일 때 손가락이 잘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많이 했다. 우리 동네에서 소풀 썰다가 손가락 잘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민학생이던 내 동무 상희가 손가락끝이 약간 떨어져 나가는 상처를 입은 건 사실이다. 방앗간 이용이 시워지면서 디딜방아가 자연스럽게 전을 거두었듯이 그 뒤 기계 작두가 나오면서 원조작두도 소리 소문 없이 은퇴하고 말았다.
새집은 세칸짜리였다. 맨왼쪽이 여물솥이 걸린 소우리고 우리에 붙은 방이 큰방 그리고 곁방이 달려 있었다. 겨울이면 여물솥에 물을 데워 할매가 나를 목욕시키곤 했다. 떼를 벗기는 척 하면서 슬쩍 불알을 만져보곤 했다. 무쇠솥 아궁이에 남은 잉걸불이나 재에 고등어나 감자, 고구마를 굽기도 했다. 군감자와 군고무마 맛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