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onio Canova (1757-1822), Rome, 1793 (프랑스에서 기요틴의 제물이 가장 많았던 해).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는 아풀레이우스(2세기 무렵에 활동을 한 작가)의 [황금 나귀]에 삽인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나온다. 호기심 많은 주인공 루시우스는 주술에 너무 빠진 나머지 나귀로 바뀌어 인간세상의 갖은 쓴맛을 다 겪고나서 장미화환을 먹은 뒤에 다시 사람으로 되돌아온다. [황금 나귀]는 부제가 [변신]으로 루시우스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여러 부류의 인물군들을 만나는 피카레스크적 구성을 보여준다. 그 중 도적떼한테 잡혀온 처녀한테 노파가 슬픔을 달래려고 해주는 이야기가 [에로스와 프시케]이다. 시어머니 비너스가 낸 시험문제 네 개를 다 풀어야 프시케는 에로스를 다시 볼 수 있었다는데... 허면 비너스는 미의 여왕 자리를 프시케한테 물려주었나요? 비너스의 슬픔은 여기에서 비롯되는데, 그럼 비너스의 슬픔이란 도대체 뭐요?
옛날 옛적에 어떤 왕이 있었는데 딸이 셋이었다. 첫째 둘째 딸은 보통의 미모를 타고 났는데 셋째 딸은 너무도 아름다워서 인간의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셋째의 이름은 프시케. 미의 여신을 능가하는 미모를 가졌다는 소문이 사방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둘째와 달리 프시케는 신랑감을 찾지 못했다. 신탁은 프시케의 신랑감은 흉측한 괴물일 거라고 예언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셋째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언덕 위 깎아지른 바위 위로 데려간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프시케를 에로스의 황금궁전으로 데려다 준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에로스는 밤에만 프시케를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동이 트면 사라진다. 에로스와 사랑을 지속하려면 프시케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 절대 안 된다.
괴물한테 시집 간 걸 안타까워 하던 언니들이 궁금해서 동생집을 찾아간다. 동생의 신랑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선물 받아 되돌아간다. 하잘 것 없는 불구 신랑들과 결혼한 두 언니들은 질투심이 불붙는다. 다시 동생집을 찾아간다. 이번에는 프시케한테 괴물 신랑이 언제 해칠 지 모르니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언니들의 말에 솔깃해진 프시케는 신랑이 잠든 틈을 타서 칼과 램프를 들고 괴물을 물리치기로 한다. 램프를 켠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랑의 신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램프에서 기름이 떨어져 에로스의 날개를 태운다. 금기를 깼으니 에로스는 날아가 버린다. 이리하여 프시케의 에로스 찾아 삼만리가 시작된다.
급기야 프시케의 소문이 비너스한테 까지 이 소문이 들어갔다. 비너스 신전에는 제물이 줄어들고 향은 끄지고 싸늘한 재만 남는다. 질투심을 느낀 비너스는 개구쟁이 망나니 자신의 아들 에로스를 보내 프시케가 가장 추한 신랑감한테 사랑에 빠지도록 심부름을 시킨다. 그런데 프시케를 본 에로스는 자기 어머니의 명령을 뒤로한 채 프시케한테 사랑에 빠진다. 배신감을 느낀 비너스는 프시케를 곤경에 빠뜨린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네 가지 시험문제를 낸다. 프시케는 세 가지 문제 풀이를 모두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해결했다. 비너스는 프시케가 스스로 해내었다고 믿지 않았다. 마지막에 프시케한테 지옥의 세계에 내려가서 지옥의 여왕 페르세포네한테 신의 아름다움을 얻어 유리병에 넣어오라고 명령한다. 지옥으로 가는 입구에 자리한 높은 탑이 지옥으로 가는 방법과 거기서 나오는 방법을 세세하게 프시케한테 가리켜준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지상 세계로 올라온 순간 프시케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마찬가지로 오르페우스도 그 호기심 때문에 유리디체를 잃지 않았던가! 뚜껑을 열자 거기서 나온 김을 쐬고는 치명적인 잠에 빠져든다. 잠든 프시케를 에로스가 날개 달고 날아와서 업고 자신의 궁전으로 데려가 키스와 사랑의 화살로 다시 살려낸다.
가장 감동적인 키스 장면을 묘사한 조각. 두 사람의 팔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미는 음악의 선율에 맞춰 듀오로 춤추는 발레의 한 장면 같다.
물병 옆에 놓인 화살로 숨이 끊긴 것 같은 프시케를 건드린다. 잠 자는 에로스를 프시케도 이 사랑의 화살로 찔러 보았다. 그러니 둘 다 가슴이 불타오를 수밖에.
에로스한테 날개를 떼버리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저 뒤쪽 스탄가궁(Stanga) 문 앞에서 쇠사슬에 묶인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반항하는 노예]가 이쪽을 노려본다. 날개를 떼버리면 망나니 같은 나쁜 짓은 더 이상 못하리. 이런 날개는 그야말로 사족이다. 날개만 없애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현대적일 텐데... 여전히 고리타분한 신고전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대를 뛰어넘는 사람을 천재라고 하지 않는가.
쇠로 만든 손잡이는 뭐하려고 붙여놓았나. 이 작품에 관한 한 유사품에 주의해야 한다. 루브르에서 보는 게 오리지날이니 참고하시라. 이 작품이 완성한 뒤로 인기가 하늘로 치솟자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하는데, 대부분 카노바 제자의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조각을 볼 때는 한 바퀴 돌아가며 구경하라. 각도에 따라 작품이 주는 깊이감이 달라진다. 마침 한국 단체 관광객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이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
맨 처음 두 시선이 마주쳤을 때 피어나는 순간의 감정을 사랑이라 하던가. 그 소중한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래 지속되어도 처음의 신선함은 사라지고 만다. 사랑이 공고해졌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변질되기 시작한다. 흔히 사랑의 하향곡선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다해 그 본질은 뒤로 한 채 사랑의 행위만을 하릴없이 반복하는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건 어쩌면 꺼져가는 사랑의 불꽃을 애써 유지하려는 허망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유일하고 귀한 순간이 사라지면 그걸 되살리려고 부질없는 행위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드라마는 결혼 아니면 죽음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사랑이 이루어졌다거나 실패하면 더 이상 사랑 이야기는 연장될 수 없다. 서로 등돌리고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해대는 오노레 도미에의 [결혼 여섯 달 뒤]라는 풍자화가 자꾸 떠오른다.
이렇게 빈틈없이 매끈하게 마무리 잘 된 걸 추구하면 그야말로 매너리즘에 빠진다. 잘빚은 항아리 이상이어야 뛰어난 예술품이 되지 않을까. 그냥 그럴듯해서는 감동이 없다. 그걸 뛰어넘는 치열한 작가혼이 표현되어야 한다.
카노바, [에로스와 프시케], 1797. 영혼을 상징하는 나비를 쥐고 있다.
보르게제 컬렉션, [에로스와 프시케], 2세기, 18세기에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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