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 서쪽 28킬로 지점 센강변에 위치. 7세기에 이 곳에 처음 자리잡은 베네딕트파 수도원은 10-11세기에 증축되면서 방대한 규모로 확장된다. 중세 때는 수도사가 천 명에 이르렀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인 1793년 공매로 팔려 수도원 건물은 건축 자재의 채석장이 되면서 폐허로 변한다. 1852년에 소유주가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
프랑스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처음 수도원이 생겨나는 것은 4세기 중엽이었다. 360년 무렵 프와티에의 주교 생틸레르(St Hilaire)와 합류하여 군인에서 전도자가 되는 후일 투르의 주교 생마르탱(St Martin)이 프아티에 근처에 수도원을 설립한다. 그리고 371년에 생마르탱은 다시 투르 근처에 마르무티에(Marmoutier) 수도원을 연다. 5세기초까지만 하더라도 많지 않던 수도원은 600년 무렵이 되면 2백여 개로 늘어난다. 7세기 동안 세 배로 늘어나 전성기를 맞이한다.
10세기부터 성당 개혁이 일어난다.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클뤼니(Cluny) 수도원은 지방 권력과의 관계를 끊고 로마 교황청 직속이라는 독립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기도와 전례를 수도사들의 생활에서 우선시하게 된다.12세기 초 클뤼니 수도원장의 지도 아래 1100개에 이르는 수도원이 모인다. 그 중 800개가 프랑스 수도원이다. 성당 주도로 무사계급의 폭력을 제한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권력자들로부터 약자들 예를 들어 농민, 성직자, 상인, 순례자 등을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한다. 권력자들로부터 평화를 지킨다는 서약을 하게 만들고 어기면 파문 같은 징계를 내린다. 또 11세기 초가 되면 성당력에 따라 어떤 날이나 시기는 군사적인 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레고리 7세(1073-1085)의 개혁으로 속계에서 성직자 임명권을 박탈한다. 12세기 프랑스 성당은 이 개혁에 큰 영향을 받아 성당의 참사회 소속의 수도사들이 주교를 선출한다는 원칙을 만든다. 그리고 거의 사라졌던 학교를 대성당 주변에 다시 세운다. 이러면서 세속적인 성직자들은 신도들을 위해 봉사하는 임무에 충실하게 된다. 클뤼니에 클뤼니 수도회가 설립되면서 1088-1130 서양에서 가장 강력한 수도회로 자리잡는다.
영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수도원 생활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 1084년 은둔생활에 집중하는 그르노블 지방에서 설립된 샤르트르 수도회, 반대로 설교를 통해 전도에 치중하는 1120년 랑(Laon) 지역에 설립된 프레몽트레 수도회, 초기 기독교의 순수함(성 브누아의 수칙)으로 되돌아가 청빈과 속세를 등지는 걸 강조하는 1098년 부르고뉴 지방에서 설립된 시토 수도회가 생긴다. 특히 시토 수도회는 큰 성공을 거두어 1200년에는 530개로 늘어난다.
이런 외딴 곳에 수도원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많이 찾으면 수도원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난다. 공교육기관이 거의 없던 시절 수도원은 교육기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기독교 교리와 엄격한 윤리 교육을 전수하는 전당이었다. 특히 시집가기 전까지 여자애들은 수도원에서 순진무구(?)하게 교육받으며 자란다. [레미제라블]의 여주인공 코제트를 떠올릴 것.
인쇄술이 나타나기 전까지 수도사들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필사본을 만드는 거였다. 베끼는 일은 단순한 복사가 아니라 책을 만드는 일임과 동시에 예술행위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세밀화와 함께 형형색색의 글자로 아로새겨진 중세 수사본을 보라. 쓰는 행위와 그리는 행위가 합쳐진 일이다.
게다가 수도원장은 세속적인 인물인 권력자의 측근이 임명되는 수가 많았다. 왕이나 귀족의 기부로 재정이 꾸려지면서 수도원은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된다. 물론 수도사들의 경제활동을 통해 재정을 충당하기도 한다.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대개 질이 좋다. 신앙심으로 뭉쳐 일한 수도사들의 정성이 담겨서 일까. 맥주는 수도원에서 빚은 게 최고다. 그렇지만 쥐미에쥬 같이 큰 수도원이 운영되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부가 필수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쥐미에쥬는 재정난에 허덕였다. 건물을 수리할 자금이 없어서 천장이 내려앉았다.
영적인 뭔가를 찾아 수도원을 찾기도 하지만 도피성으로 들어오는 수도 많았다. 수도원을 무대로 연애사건이 펼쳐지는 스탕달의 [이탈리아 연대기]를 보라. 야밤을 통해 수도원에 은거 중인 여인을 납치하여 빼내가는 액션스타 같은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은가? 프랑스 왕 루이7세도 아네스 소렐을 쥐미에쥬에서 만났다는데... 그 많던 수도사와 일반 기숙생들은 '도시의 타락된 공기를 마시고' 감쪽같이 사라진지 오래다. 루소의 [누벨 엘로이즈]를 읽은 청춘 남녀들은 모두 도시물을 먹고 타락해버렸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폐허를 주로 그린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를 떠올림직하다. 폐허가 된 중세(고딕건축)에서 낭만주의가 태어난 것도 사실이다. 결핍에서 창작력이 생겨나는 것 또한 거짓말은 아니다.
수도원 입구. 8각형의 두 종탑이 보인다. 왼쪽 화면 현재 우체국과 관광안내소로 쓰는 건물에는 [괴도 루팡]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1864-1941)이 살았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일반인들의 성당으로 쓰인 노트르담.
벽이 건축재료로 뜯겨나가면서 로만 양식을 뒤덮어 고딕으로 바뀐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창문틀이 반원에서 첨두형으로 바뀌었다.
수도사들의 성당 성 베드로. 노트르담과 성 베드로는 벽 하나를 두고 붙어 있다. 수도원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분. 정면 벽면 양쪽으로 지하감옥으로 가는 계단이 엿보인다. 규율을 어긴 수도사들을 가둬 벌 주던 곳. 주로 어긴 규율은 과연 뭐였을까? 그도 역시 연애사건이 아니었을까. 남녀 혹은 남남.
벽면이 뜯겨 나가면서 원래 시작된 로마네스크 양식이 뚜렷하다.
사각에서 팔각으로 바뀐 거대한 두 개의 종탑은 노르망디 지방의 대표적인 특징. 채광창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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