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전시회

파샤 (pacha) 2013. 11. 17. 07:29

2013년 11월 현재 볼 수 있는 전시 포스터. 지금 나폴레옹 홀에서는 [르네상스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피렌체에서 가져온 (주로) 조각 전시가 진행 중. 피나코테크에서는 고야와 브뤼겔 전시회, 그랑 팔레에서는 발로통과 브라크, 오랑주리에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전시회...

르네상스에 새롭게 등장한 원근법은 도나텔로, 기베르티 같은 조각가가 조각에 먼저 적용하였다. 



드농관에 전시중인 로버트 윌슨의 거실 가운데 [레이디 가가의 초상]. 오른쪽은 데생 전시실에서 전시 중인 [16세기 화가 집안, 장 쿠쟁 아버지와 아들].



로버트 윌슨 페스티발 포스터.


로버트 윌슨. 데생, 그림, 조각, 건축, 디자인, 음악, 춤, 연극, 비디오, 퍼포먼스 등 봅 윌슨(Bob Wilson)의 작품은 모든 예술 영역에 걸쳐 있다. 이를테면 토탈 아티스트.

윌슨은 공동작업을 많이 한다. [해변의 아인스타인]에서 무용에서는 루신다 칠즈(Lucinda Childs), 음악에서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와 공동작업을 했다. [해변의 아이스타인]은 필립 글래스와 공동창작한 첫 오페라로 1976년 아비뇽 페스티발에서 첫선을 보인다. 배우로서도 활약하여 무대에 오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1995년에 솔로로 공연한 [햄릿].



미국 텍사스 출신의 다재다능한 로버트 윌슨은 공간 활용에서 새 장을 연 유명한 연출가로 현재 파리 시립 극장과 샤틀레 극장에서 그가 연출한 몇 편의 연극이 공연 중이다. 루브르에서는 세 점의 패러디 초상과 [거실]이 전시 중이다.


전시 광고, [Gaga Portraits 속된 초상들]. 쉴리 입구로 들어가 중세 루브르의 끝부분 왼쪽에 전시실이 있다. 


그랑 갤러리에 전시된 안드레아 디 솔라리오의 '[세례 요한의 목](1507)의 변주'와 신고전주의 전시실에 있는 앵그르의 [카롤린 리비에르(1793-1807)의 초상의 패러디.

윌슨은 열 살 생일 때 집안의 아저씨로 부터 의자를 선물받는다. 그 이후 의자는 윌슨이 숭배하는 물건이 된다. 열일곱 살부터 의자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젠 그림 그릴 때 물감과 화폭이 필요없다. 화면과 페인팅 프로그램만 있으면 충분하다. 화면을 밝힐 전기도 꼭 필요하다. 전통적인 그림은 빛이 있으면 보이지만 새 그림은 빛을 공급하는 전원이 필수다. 전기를 끊어버리면 그저 어둡컴컴한 플라스틱 용기에 불과하다. 


솔라리오(Solario), [세례 요한의 목], 1507. 그랑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의 변주]. 시간이 지나면 이미지가 변한다. 중첩되기도 하고 선명해졌다가 흐릿하게 변하기도 한다. 목이 얼굴이 눈알이 돌아가며 움직인다. 이리하여 미술은 공간예술에서 시간 예술로 바뀐다. 목이 베어져 죽은 줄도 모르고 눈을 멀뚱거린다. 쟁반에 비친 자신의 죽음을 냉소하는 걸까. 죽을 때도 눈알을 돌리면 저리도 많은 별들이 하늘에 반짝인다. 별 보면서 죽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눈을 부라리고 둘러보면 내가 죽어도 지구는 쉴 새 없이 뱅글뱅글 돌아간다. 어쩌면 지구가 아니라 내가 돌아가는 지도 모른다. 이제 자신의 죽음도 영상화하여 스스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죽는 시대가 왔다. 그것도 특수효과를 처리한 방식으로 제작한 영상매체를 통해.















[속된 카롤린 리비에르의 초상]. 열세 살의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는 세속적인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여인으로 둔갑하였다. 카롤린처럼 열넷에 요절하지 않고 성숙하였으나 세상에 부대낀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서글프지만 이게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의 초상! 반박할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


하늘 위로 흰 새가 날아가고 한참 지나면 이 여인은 윙크를 한다. 그 정도의 참을성을 가지고 화면을 바라보라.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의 패러디]. 이 작품은 앵그의 [오달리스크]가 걸린 뒷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모나리자 전시실을 빠져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보인다.

혁명의 전사였다 살해된 게 아니라 치정 사건에 얽혀 살해된 여인. 혁명의 르뽀를 쓰는 게 아니고 연애편지 쓰다가 칼을 맞는다. 결국 저 깃털달린 펜대가 문제다. 지렁이 기어가듯 펜대를 놀리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텐데... 자고로 말과 글은 가려서 하고 써야함.


조명을 통해 펜대를 든 시신이 드러나고 배경이 환해지면서 죽음을 몰고온 단서인 편지가 밝혀진다. 

살해당한 이 여인도 잠시 눈꺼풀을 들어 자신의 죽음을 반추한다. (두 번째 사진)

아님 반성일까? - 내가 뭐 잘못했다고 죽임을 당했지?

이젠 죽고 나서도 행동을 잘 취해야 할 때가 왔다. 피드백으로 드러내야 하니까.

약 일 분 정도 구경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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