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 프랑수아1세가 되는 꼬마가 사촌형(샤를8세)의 집에 와서 놀던 곳이며,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프랑수아1세는 이곳에 본격적으로 세련된 궁정생활을 도입한다. 바로 프랑스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중세시절의 방어용 성채는 화려한 연회를 위한 장식적인 성으로 변한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맞대 있는 앙부아즈성. 왼쪽이 샤를8세 때 지은 말기 고딕 양식의 본채, 오른쪽이 루이12세와 프랑수아1세 때 건축된 르네상스풍 본채. 원래 방대했던 앙부아즈성은 1806-1810년에 걸쳐 성을 허물 때 왕의 거처로 쓰인 두 본채만 살아남는다. 일부만 살아남아 폐허가 된 앙부아즈성이 아주 맘에 든다. 허물어진 남은 파편으로서 성은 더욱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부르타뉴 공국의 마지막 주인공 안 드 부르타뉴가 프랑스왕과 결혼하면서 부르타뉴가 프랑스령이 된다. 1830년에 왕이된 루이필립한테 생포되어 끌려온 알제리의 수장(에미르) 압델 카데르가 한때 머물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한테 잘 알려진 앙부아즈의 명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앙부아즈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클로 뤼세에 기거하며 다 빈치는 프랑수아1세의 품에 안겨 죽는다(앵그르의 그림은 프티 팔레에 소장)는 그림이 남겨질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맺는다.
창문 위 첨탑 장식을 보면 딱딱한 고딕양식에 비해 르네상스양식이 훨씬 아기자기하다.
프랑스 대혁명 때는 몽생미쉘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앙부아즈성은 국가감옥으로 쓰인다.
프랑스 왕가의 문장(백합)과 부르타뉴의 문장(담비)이 새겨진 기가 번갈아 가며 휘날린다. 이탈리아풍 정원 앞에 최초의 다 빈치 무덤 자리에 그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둥근탑(tour cavaliere)이 원래 밖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던 성의 입구. 말과 마차가 이곳을 통해 직접 성 안으로 들어왔다.
성에서 내려다 본 앙부아즈 시내
오른쪽으로 루아르강이 흐른다. 성은 언덕 위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다. 물론 방어용으로 더 없이 좋았다.
이탈리아풍 정원.
사냥꾼의 성인의 이름이 붙은 생위베르(St-Hubert) 소성당. 이 안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해 일부가 묻혀 있다.
이탈리아식으로 이름을 새겨두고 있다. 천재 예술가에 대한 예우인가? 국수주의자(쇼뱅) 프랑스 사람들이 이런 아량을 베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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