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보아야 하는 파리의 명소

소르본 대학과 생미쉘 지역

파샤 (pacha) 2012. 2. 21. 01:50

  소르본 대학의 성당(지금은 주로 전시공간으로 쓰임)과 소르본 광장 그리고 오른쪽으로 자리잡은 카페들. 성당 안에 17세기 초 총장을 지낸 리슐리외 추기경의 무덤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 때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해는 센 강물에 던져지는데 일부가 여기에 안치되어 있다. 대문자로 혁명이라고 쓸 때는 대단한 뭔가가 있어서이다. 이 광장 앞길이 그 유명한 불미쉬, 1968년 학생혁명의 현장이다. 여남은 남짓한 단체 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성당 앞에 설치된 가건물은 헌혈자를 기다리는 텐트. 사진 오른쪽 카페(소르본 담배가게) 옆 바로 길가집이 옷가게인데 예전에는 Puf라는 서점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점을 밀어낸 옷가게의 위력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책살 돈 있으면 옷사시오 옷을 사. 소르본 건물에 이르기 전 왼쪽 끝은 파피로스(Papyros)라는 복사집인데 파샤는 여기서 논문 제본을 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주인 아저씨는 문을 나설 때면 으레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넨다. 논문제본은 파피로스에서. 


생미쉘에 가면 영원한 대학생이 된다

  패스트푸드점과 옷가게가 이곳을 점령하고, 다리품 파는 여행객이나 버스 탄 관광객이 이곳을 침투해도 '생미쉘'은 그 전통을 잘 지켜간다. 생미쉘의 서점과 카페, 도서관은 대학생들의 왕국이다. 그야말로 이곳은 수세기 동안 대학생들의 본거지였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신학생 쟝 프롤로와 그의 친구 페뷔스가 술취해 혀 꼬인 소리로 지껄이며 비틀비틀 걸어가던 곳이 바로 이 동네 어디메쯤. 쟝 프롤로는 길바닥에 꼬꾸라져 곯아 떨어지고, 군인 페뷔스는 에스메랄다와 밀회를 가질 호텔로 떠나는데, 그의 뒤를 노트르담의 신부 클로드 프롤로가 그림자처럼 쫓는다. 

생미쉘 지역은 1867년에 생긴 '불미쉬'라 부르는 생미쉘 거리 주변을 말한다. 1812-1816년 사이에 쌓은 생미쉘 강둑에 1853년에 생미쉘 다리가 새로 놓인다. 1860년에 생미쉘 분수대가 생미쉘 광장을 등지고 자리잡는다. 생미쉘 광장은 파리에서 가르니에 오페라 앞 계단과 함께 가장 애용되는 만남의 장소. 생미쉘 거리를 따라 뤽상부르 공원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에콜 거리가 가로지른다. 1852년에 학교(에콜) 길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에콜거리는 중세 때부터 학교의 본거지였다. 좀더 가면 소르본 광장과 소르본 거리가 나온다. 리쉴리외 추기경의 무덤이 자리잡은 소르본 성당 앞 소르본 광장에는 최근에 분수가 새로 설치되었다. 광장 한쪽은 '에크리투아르'와 '에콜리에' 카페가, 맞은 편은 서점과 복사 가게가 있다. 공부 벌레들은 가까운 PUF[1]나 지베르 서점을 진득하니 파고 들거나 에크리투아르나 에콜리에에서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끝날 줄 모르는 토론을 벌인다.

소르본은 루이 9세(성 루이)의 전속 신부이며 고해성사를 맡은 로베르 드 소르봉이 1257년에 가난한 신학생을 위해 세운 학교다. 15 세기 중엽에 세상을 확 바꾼 인쇄술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이 바로 소르본 도서관이었다.

 

 대학생들은 생미쉘 어디나 있다.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고, 공부를 하거나 한잔 걸치기도 한다. 이 지역은 대학생들의 세계, 그저 그렇고 그런 그들의 세계가 아니라 그들만의 고유한 세계다. '생미쉘'은 그야말로 대학생들의 아지트다. 몇 개의 대학교와 고등학교, 각종 학교들이 이 사실을 잘 알려준다. 68년 분노한 젊은이들이 이곳을 혁명의 도가니로 만들었기에 봄철은 학업을 게을리 했다는 인상이 남아 있다. 그런 추억은 이미 희미해지고 대학생들은 면학의 길로 접어든지 오래다. 

 

파리 좌안에서 마지막으로 살아 남았던 포르노 영화관 '라탱'이 문을 닫았다. 한물간 유행의 영화 포스터는 지베르 서점의 광고판으로 바뀌고, 이 바닥은 지식으로 꽉 들어차게 되었다. 그렇지만 생미쉘은 그 매력을 많이 잃었다. 선술집들이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하나 둘씩 패스트푸드점이나 옷 가게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장소가 변해도 정신은 늘 그대로이다. 새학기가 되면 변함없이 대학생들은 이곳에서 신입생환영식을 치른다. 쓰레기통에 쓰는 비닐 봉지를 껴 입고 화장지를 둘둘 말아 머리를 단장하여 빗자루나 변기 쑤시게, 할로겐등 같은 것으로 해괴하게 중무장한 젊은이들이 관광객, 주민 할 것 없이 아무한테나 손을 내민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은 깜짝 놀라거나 식상해서라도 하는 수 없이 돈을 건넨다.

 

한때 이 바닥을 주름잡던 당신이 유리창에 대고 젊은 시절의 날씬한 몸매를 되돌려 달라고 애원해 보라. 유리창은 한사코 젊은 시절과는 영 딴판인 중년의 이미지만 끈질기게 되돌려준다. 이마는 더욱 훤해지고 하나 둘씩 돋는 흰 머리는 아무래도 숨길 수 없다. 반듯하고 뚜렷하던 얼굴 윤곽이 완만해져 푸근해 보이고 예리하던 눈빛은 이제 부드러워졌다. 날렵하고 잘록하던 허리는 영락없는 통나무며 납작하던 배는 아무리 감추어도 가슴보다 앞서 나온다.

 

라탱 지역은 언제나 보헤미안, 젊음, 환상의 거리였다. 공상적인 낙오자, 정조 개념이 희박한 아가씨들, 파리를 정복하러 온 발자크의 이상형인 대학생들(라스티냑이나 뤼시앵)이 이 구석의 단골들이었다. 옛날 대학생들은 열심히 강의에 참석하거나 유행하는 카페, 즉 바쉐트, 다르쿠르, 팡테옹 선술집에 번질나게 드나들거나 매주 토요일과 목요일에 '불리에' 무도장으로 춤추러 다녔다. 오늘날 젊은이들한테도 라탱 지역은 여전히 없는 게 없는 그들만의 아지트이다.

 

무심한 세월이 선술집을 은행이나 상점으로 바꾸고 말았다. 아무튼 과거의 이미지를 간직한 구세대한테는 생미쉘은 실낙원이다. 생미쉘 거리와 에콜 거리 모퉁이의 '바쉐트' 카페는 은행이 되고 말았으니. 불미쉬에는 패스트푸드점과 상점이 나날이 늘어 간다. 많이 변했지만 옛날 같은 곳도 여전히 많다. 에콜 거리는 거의 그 대로이다. 로마시절의 온천장이던 중세 박물관 앞 클뤼니 정원은 제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지 않는가.

 

자세히 눈여겨 보면 이곳을 맴도는 이 가운데는 영원한 대학생이 많다. 영영 학교를 못 떠나는 영원한 대학생들이 스쳐가는 젊은 대학생들과 한데 어울려 거닌다. 혹 당신도 영원한 대학생? 무슨 그런 가당찮은 발언을! 생미쉘에 가면 아직도 내 가슴은 설렌다!

[1] 2006년 봄 옷가게에 밀려 PUF도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자본주의 만만세. 대신 들어 선 집은 중저가 옷가게 Delaveine(글자 그대로는 운 좋은 집).


2012년 5월 15일. 소르본 광장


오른쪽 모퉁이 건물이 옷가게로 변해버린, 흔적없이 사라진 옛 PUF서점 자리다. 시간이 흐르면 세대가 바뀌고 언젠가는 서점의 추억도 희미해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지리라. 그래서 추억이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 소중하다. 기억력의 한계가 뚜렷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파샤의 블로그는 자료를 정리할 요량으로 그렇게 시작된 거다. 추억을 떠올리기 보단 망각에 대항하려고 말이다. 망각만세!



학교길과 생미쉘로가 만나는 모퉁이. 불켜고 정면으로 달려오는 자동차 뒤 오른편이 소르본 대학. 소르본 맞은 편이 작은 공원인데 공원 가장자리에 몽테뉴의 동상이 있다. 사람들이 하도 몽테뉴의 발을 만져대서 반들반들하니 광채가 빛난다. 유명인사가 되고 볼 일.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 광장에서 바라본 팡테옹. 프랑스 위인들을 모신 팡테옹은 현재 지붕 보수 공사중. 안에 레옹 푸코가 지구의 자전을 증명해보인 푸코의 진자가 설치되어 있다. 팡테옹이 자리잡은 데를 파리의 수호성녀의 이름을 따서 생쥬느비에브 언덕이라 부른다. 광장을 지나자마자 양쪽으로 자리잡은 패스트푸드점이 보인다. 위인들을 모신 신전에 들어가기 전 허기를 달랠 필요가 있을까.

사진의 반대쪽에 로스탕 카페가 있다. 멋진 공간이다. 한번 들어가 보시라.


30.05.14 Le Rostand cafe.


만남의 광장 생미쉘 분수대. 미카엘 대천사장이 악의 상징인 용을 짓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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