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가보아야 하는 파리의 명소

콩코드 광장

파샤 (pacha) 2012. 2. 25. 06:39

일치, 화합이란 뜻을 가진 광장. 맨 처음 루이15세의 광장,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는 혁명의 광장 그리고 19세기 초에 루이16세의 광장을 이어 1836년에 콩코드 광장이 된다. 콩코드 광장은 대선이 끝난 다음 우파지지자들의 집결지로 쓰인다. 반면 좌파지지자들은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다.

1793년 1월에 루이16세가 같은 해 10월에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 광장에서 기요틴으로 처형당한다. 루이16세는 39세, 마리 앙트와네트는 38세였다. 

그리고 왕가의 보물을 중심으로 루브르 박물관은 1793년 8월 10일에 문을 열었다. 1793년은 이 광장에서 기요틴이 가장 바쁜 해였다. 기요틴을 만든 키요탱 의사는 기요틴의 제물이 되지 않았다.

오벨리스크 오른쪽 뒤 멀리에 나폴레옹의 승리의 개선문이 보인다.


오벨리스크 꼭지점의 황금빛 찬란한 끝부분은 태양신과 접선하는 안테나인가.


룩소 신전에서 파리까지 가져온 오벨리스크 (서쪽). 와전 되어 나폴레옹이 뺏어왔다고 나오는 책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828년 이집트의 부왕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로 준 것이다. 나폴레옹은 1821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죽은 뒤의 일이다. 

그래도 룩소에는 이것보다 좀 더 큰 또 하나의 오벨리스크가 남아 있다.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는 람세스2세의 업적을 나타낸다. 그는 통치기간이 68년에 자식은 무려 102명을 두었다. 루이14세의 통치기간은 72년.


크리용 호텔과 해군본부 (북쪽). 해군본부가 새집을 지어 이전하게 됨에 따라 이 저택은 루브르 분점으로 쓰일 예정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항의하지 않았더라면 사르코지 치하에서 아랍부호한테 팔려 호화판 관광호텔이 될 뻔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인물을 다시 대통령으로 뽑지 않은 프랑스 사람들은 어느 정도 균형 감각이 있다.


튈르리 공원쪽 (동쪽). 튈르리 들머리 오른쪽에 오랑주리(Orangerie), 왼쪽에 죄드폼(Jeu de paume)이 있다. 


오랑주리의 폴 기욤 콜렉션은 볼 만하며, 클로드 모네의 최후의 걸작 여덟 폭 수련 연작은 물과 하늘, 꽃과 나무가 혼연일체가 된 모네 예술의 정점으로 이끈다. 오랑주리의 소장품 가운데 파열된 인체 묘사가 인상적인 샤임 수틴의 작품이 여럿 있다. 수틴의 작품 가운데 파샤가 일주일간 민박을 했던 니스(Nice) 뒷동네 생자네(Saint Jannet)를 그린 그림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다. 반고흐에서 뭉크로, 수틴에서 베이컨으로 가는 뒤틀린 인체 그림은 그로테스크하다. 편안함 보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자기 소외의 미학이라고 할까. 보통의 인체를 묘사해서는 주목을 끌지 못하는 세상이 돼 버려서일까. 한편 미국에서는 '팝아트'가 생겨난 걸 보면 대중적인 것도 기형적인 형상 만큼이나 예술적인 소재가 된다.


오른쪽 화면 앞부분에 조명탑은 철을 즐겨 쓴 독일 건축가 히토로프의 작품. 끝에 카루젤 개선문이 있는 곳이 루브르다. 튈르리 공원 안에는 두 개의 분수대가 있는데 하나는 원형이고 다른 하나는 팔각형이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분수대에서 어린 아이들이 돛단배를 젖는 놀이를 한다. 다산성과 충일함을 보여주는 마이욜의 조각품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마이욜은 로댕의 협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둥글둥글하고 풍만한 마이욜의 여체 처럼 세월이 갈 수록 그 넉넉한 육덕이 좋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원의사당(Assemblée nationale)쪽 (남쪽). 프랑스 하원 의원은 577명이고 임기는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5년이다. 지붕 왼편 뒤쪽으로 노랗게 삐죽 솟은 노란 탑이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된 돔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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