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성
루이13세의 사냥용 별장이던 베르사유성을 루이14세가 1661년부터 20년간 확장공사를 하고 1682년에 수도를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옮긴다. 그때부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는 1789년까지 왕실과 정부가 머문다. 1678년 르보를 이어 망사르가 2층의 테라스를 고쳐 전쟁의 방, 거울의 방, 평화의 방을 새로 만든다. 망사르의 뒤를 이은 드코트는 왕실 성당과 헤라클레스의 방을 완성한다. 베르사유성의 실내장식은 르브랭이, 정원 설계는 르노트르가 맡는다.
베르사유의 성과 정원은 태양왕 루이14세의 침실을 중심으로 대칭구조로 설계되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동원하여 왕권을 신성화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버려진 베르사유성은 1837년 루이필립왕의 노력으로 프랑스의 모든 영광에 바치는 프랑스 역사 박물관이 된다.
1870년 프로이센 군사령부가 주둔하고, 1871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의 왕이 독일제국의 빌헬름1세로 황제 대관식을 치른다. 같은 곳에서 1919년 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을 맺는다.
거의 1년만에 되찾아간 베르사유성, 왕실성당이 복원공사 중이다. 2018.06.21
성루이 성당의 모습. 사진 아래 백합 문장이 새겨진 카펫이 깔린 자리가 왕족이 자리 잡던 2층 난간.
2층에 늘어선 코린트식 기둥들과 천장화가 그려진 높은 천장이 상승하는 느낌을 주고 양쪽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 밝아 보인다.
- 왕실 성당 : 1710년 성루이 성당으로 축성되어 루이15세, 루이16세, 루이18세, 샤를10세가 결혼식을 했다. 매일 10시에 미사가 있었다. 사분의일 궁륭의 천장화는 예수의 부활(Charles de la Fosse)을 보여준다. 천장 양쪽으로 구약과 신약 성서의 일화들이 그려져 있다. 천장 중앙에 Antoine Coypel, [인류한테 속죄의 약속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조각과 그림 등의 실내장식은 새 유행을 예고한다. 베르사유성에서 단연 가장 높은 건물. 거울의 방 공사비용의 두 배 이상이 들어간다.
- 헤라클레스의 방 : 가장 늦게 1736년에 완공. 르무안(François Lemoine)이 그린 천장화(142명의 인물)는 신의 대열에 들어가는 헤라클레스 영웅을 보여준다. 앞뒤쪽 벽에 베네치아 총독이 루이14세한테 선물한 베로네제의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하는 예수]와 [엘리제르와 레베카]가 걸려 있다. 성루이 성당 이전 네 번째 왕실 성당이던 이 방은 연회 장소로 많이 썼다.
- 풍요의 방 : 초기에 루이14세의 골동품 전시실. 야회 때 음료(커피, 초컬릿, 주스, 술)를 차려 놓던 방으로 루이14세 자손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왼쪽 벽부터 루이14세의 둘째 손자인 앙주 공작(에스파냐의 필리페5세), 아들인 대왕세자 루이, 그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부르고뉴 공작의 아들 루이15세의 초상화다. 천장화 : René-Antoine Houasse, La Magnificence royal, Le Progrès des Beaux-Arts, Vases précieux (문 위 아랫쪽 천장 - 돛이 없는 왕의 배는 왕권의 상징으로 왕의 식탁이나 찬장 위에 두었다. 왕이 없을 때도 이 앞을 지나면서 왕의 배를 향해 절을 하게 되어 있었다. 냅킨을 놓았다).
- 비너스의 방 : 미의3여신에 둘러싸인 비너스 여신을 보여주는 천장화(Houasse)와 정면에는 로마황제 복장의 루이14세 조각상(Jean Warin)이 있다. 자크 루소의 눈속임 기법으로 그린 벽화를 꼭 보라. 조각과 그림, 건축이 서로 서로 상응하는 가장 바로크적인 실내장식을 보여준다. 야회 때 꽃바구니와 함께 간식(신선한 과일, 절인과일, 편도과자)을 차려 놓았다.
- 다이아나의 방 : 천장화는 항해와 사냥을 관장하는 다이아나 여신(Gabriel Blanchard)을 보여주고, 정면 벽에 베르니니가 조각한 27세의 루이14세 흉상이 놓여 있다. 벽난로 위에 [이피제네이아의 희생] (de la Fosse)과 그 맞은 편에 [다이아나와 엔디미온](Blanchard)이 걸려 있다. 고대 흉상들은 마자랭 추기경의 수집품으로 루이14세한테 물려준 것이다. 루이14세가 당구를 치던 곳으로 이럴 때면 귀족부인들을 위한 두 개의 연단이 설치되었다. 당구에 뛰어난 루이14세가 묘기를 부리면 박수를 쳐서 ‘박수치는 방’이라고 부른다.
- 마르스의 방 : 왕의 아파트 가운데 가장 큰 방. 본디 경호원들의 방이어서 천장화는 늑대가 끄는 수레에 탄 전쟁의 신 마르스(Claude Audran)를 보여준다. 야회 때 음악 연주와 무용 공연에 할애된 방이어서 ‘무도회의 방’이라고 부른다. 양쪽 벽난로 위에 악사들의 누대가 설치되어 있었다(1750년에 제거). 정면 벽에 르브랭의 [알렉산더 대왕 발치의 다리우스 가족]과 잠피에리(Domenico Zampieri)의 [하프를 켜는 다윗왕]이 걸려 있다. 베로네제의 [엠마오의 순례]는 복제화(원화는 루브르). 왼쪽과 오른쪽 벽에 반 루(Carle Van Loo)가 그린 루이15세와 그 왕비 마리 레진스카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 머큐리의 방 : 천장에 새벽별을 거느리고 두 마리 수탉이 끄는 수레를 탄 머큐리 신(Jean-Baptiste de Champaigne)을 볼 수 있다. 이 방에도 루이15세(Rigaud)와 마리 레진스카(Louis Tocqué)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야회 때 왕가의 놀이방으로 쓰던 방이다. 앙주 공작이 에스파냐로 떠나기 전 3주간 침실로 쓴다. 루이14세의 유해가 1주일간(1715년 9월 2-10일) 안치된 곳이다. 이 방의 화려한 가구며 침대, 왕좌, 장식품들은 전쟁(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해 팔려나갔다. 1706년 모랑(Antoine Morand)이 선사한 자명종이 울릴 때 자동인형이 나오던 시계만 남아 있다. 지금 놓여진 침대는 루이필립이 박물관으로 문열 때 설치한 것.
- 아폴로의 방 : 처음에 왕의 침실로 쓰이다가 머큐리의 방으로 옮겨가면서 나중에 루이14세가 외국대사를 맞이하던 곳으로 바뀐다. 정면에 페르시아산 타피스리가 걸리고 그 앞에 왕좌가 놓여 있다. 천장과 맞닿은 벽 윗쪽에 닫집을 고정하던 갈고리가 남아 있다. 오른쪽 벽에 대관식 차림의 루이14세의 복제 초상(Hyacinthe Rigaud의 원작은 루브르), 왼쪽 벽에 루이16세의 초상(Antoine François Callet)이 걸려 있다. 천장화는 사계를 거느리고 네 필의 말이 끄는 태양의 수레를 타고 가는 아폴로 신(de la Fosse)을 보여준다. 네 모서리의 그림은 4대륙을 나타낸다. 야회 때 무용 공연을 하던 방이다.
- 전쟁의 방 : 르브랭이 그린 천장화는 루이14세의 초상이 새겨진 방패를 중심으로 승리에 둘러싸인 프랑스를 보여준다. 왕의 직무실이었다. Coysevox 쿠아즈보, [적들을 쓰러뜨리는 루이14세], 그 위로 두 소문의 신(파마)이 나팔로 승리를 알리고 아래로 쇠사슬에 묶인 두 포로가 부조를 떠받힌다. 그 아랫쪽엔 미래를 위해 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뮤즈 클리오를 보여준다. 천장과 벽면을 잇는 아치 부분에는 프랑스에 정복당해 무릎 꿇은 독일(독수리), 위협적인 에스파냐(포효하는 사자), 사자 위로 엎어진 홀란드, 전쟁의 신 벨로네를 나타낸다.
- 거울의 방 : 길이 73, 넓이 10,5, 높이 12,3 미터의 거대한 갤러리로 르브랭이 그린 천장화는 루이14세 통치 초기(1661-1678) 17년간의 업적을 다룬다. 17개의 거울과 17개의 창문, 천장의 샹들리에와 바닥의 대형 촛대 등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왕족들이 성당으로 이동하거나 왕의 행차가 왕비의 방으로 가는 통로, 궁정인이나 일반인의 통로나 기다리는 곳, 만남의 장소로 쓰였다. 제노바 총독, 태국과 페르시아, 오스만 투르크의 대규모 외교사절단을 몇 차례 영접하였다. 이럴 때면 평화의 방 쪽의 문을 막고 은으로 장식된 가구들과 함께 2,6미터 높이의 왕좌가 평화의 방을 등지고 자리잡았다. 예외적인 행사, 예를 들어 왕세자의 결혼식(1697년 루이14세 손자 부르고뉴 공작의 결혼, 1745년 루이15세 아들의 결혼, 1770년 미래의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 같은 때에 대규모 가면무도회가 몇 차례 열렸다.
- 대기실 : 대리석이 아닌 나무로 된 실내장식이 돋보인다. 벽위 아래 천장 아이들이 즐겁게 원무 추는 모습의 우아한 장식은 18세기를 예고한다. 루이14세, 루이15세, 루이16세의 흉상이 놓여 있다. Jean Nocret, La Famille de Louis XIV en 1670 en travestis mythologiques.
- 왕의 침실 :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성의 한가운데 위치. 왕의 모든 행동거지가 에티켓으로 규정되어 엄격하게 적용된 공간으로 왕권이 공연되는 장소였다. 접견, 왕의 기상(한 시간 가량 진행되고 계속해서 서열에 따라 여섯 차례의 접견이 있었다.)과 취침 행사. 1701년 머큐리의 방에서 이쪽으로 옮김. 루이14세는 이 방에 기거했지만 후손들은 행사 때만 이쪽으로 이동하였다. 침대 위 부조 - 니콜라 쿠스투, [왕의 수면을 지키는 프랑스].
- 회의실 : 11시-13시에 회의를 열었다. 일, 월, 수 - 자문회의, 화, 토 - 재정회의. 특별한 자문회의가 없는 목요일은 서출들과 하인들을 맞았다. 금요일은 미사 후 고해신부와 시간을 보냈다. 이 방에서 1775년 루이16세 때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 결정을 내렸다. 두 조각과 함께 실내 장식(rocaille)은 루이15세 시절의 것. 루이16세는 세브르의 도자기를 갖다 둔다.
- 평화의 방 : 르브랭의 천장화는 유럽이 평화를 되찾은 장면(프랑스가 강대국들에게 올리브 가지를 수여한다)을, 벽난로 위 르무안의 벽화는 유럽에 평화를 나누어 주는 루이15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벽면에 맞닿은 아치 부분은 평화를 되찾은 에스파냐, 독일, 홀란드를 보여준다. 마리 레진스카는 음악 연주회 방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놀이방으로 쓴다. 사자 모양의 황동제 불막이는 마리 앙투아네트 시절의 것을 모델로 제작한 것.
- 왕비의 침실 : 1789년 10월 6일 파리 시민들의 요구로 왕가가 튈르리궁으로 옮겨갈 때까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쓰던 대로 재현하고 있다(가구들은 1980년대에 복원). 천장(마리 테레즈)의 아치 부분에 왕비의 덕목인 자비, 풍요, 정숙, 신중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장식(마리 레진스카 시절의 것으로 프랑수아 부쉐의 단색화)되고, 오른쪽 벽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왼쪽 벽에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2세, 침대 정면 벽에 남편 루이16세의 타피스리 초상이 걸려 있다. 침대 위 닫집 가운데는 프랑스의 상징인 수탉이, 벽난로 위 거울 앞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흉상이 놓여 있다. 보석상자는 전설과 달리 왕가의 가구 관리인이 주문한 것이다. 19명의 왕자와 공주가 태어난 곳이며, 왕비 셋과 세자비 둘이 침실로 쓰던 방이다. 침대 양쪽 쪽문으로 사생활 공간으로 쓰던 12개의 작은 방들과 연결되었다.
- 귀족의 방 : 왕비가 귀족 부인들과 모임을 갖고 서로 소개하던 응접실이었다. 18세기풍의 벽지(연두색 다마스천)와 영국풍의 세련된 가구, 황동 도금과 터키옥색의 대리석으로 된 벽난로는 모두 최신 유행이었다. 정면 벽에 루이15세의 타피스리 초상이 걸려 있다. 천장 장식만이 마리 테레즈 시절의 것이고 나머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바꾼 것이다. Michel Corneille, Mercure dieu des sciences, des arts et du commerce.
- 식당 방 (대기실, 부속실) : 왕과 왕비가 가족과 함께 엄선된 몇 백의 궁정인 앞에서 만찬을 하던 곳이다. 작위가 있는 열두 귀족부인들만 식탁 앞 앉은뱅이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루이14세는 매일 같이 후손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 가졌다. 대단한 식도락가인 루이14세는 나이프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왼쪽과 정면의 루이15세 딸들의 초상과 오른쪽 벽에 세 자녀와 함께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Vigée-Le Brun)을 볼 수 있다. 1764년 6살의 모차르트가 루이15세한테 소개된 방이다.
- 근위병의 방 : 1789년 10월 6일 왕비의 근위병들(12명)과 혁명군 사이에 격투가 벌어진 곳이다. 최초의 실내장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Noël Coypel, [독수리가 끄는 수레를 탄 주피터], [주피터한테 바치는 제물]을 볼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주피터의 방(전쟁의 방이 됨)이 개조되면서 이 방으로 옮겨진다.
- 나폴레옹 기념관 : 나폴레옹의 생애를 다른 그림 세 점이 걸려 있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1822)과 [독수리기 수여], 그로(Gros)의 [아부키르 전투]다. 창문 윗쪽에 나폴레옹의 두 부인 조제핀과 마리 루이즈의 초상이 아래로 나폴레옹의 초상 두 점이 걸려 있다.
- 1792년의 방 : 발미 전투와 젬마프 전투를 나타내는 전투화와 전투에 참가한 장교 장군들의 초상이 걸려 있다. 문 윗쪽에 나폴레옹, 그 맞은 편 벽에 루이필립의 초상이 있다.
- 전쟁 갤러리 : 길이 120, 넓이 13미터. 1837년 루이필립왕이 왕자들의 아파트를 개조하여 문을 연 방으로 프랑스 역사의 유명한 전투를 그림으로 그려놓고 있다. 497년 클로비스왕의 톨비악 전투부터 나폴레옹의 1809년 바그람 전투까지 33점의 전투화다. 단연 돋보이는 들라크루아의 [타유부르의 성루이]를 찾아보라. 1830년의 방 : 7월 혁명 뒤에 시민의 왕으로 추대된 루이필립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 왕실 오페라 : 가브리엘이 미래의 루이16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 날짜에 맞추어 2년이 채 안 걸려 1770년에 완공. 당시 천 명(현재 6백 명)을 수용한 유럽 최대의 궁정 극장이었다. 무도회 때는 자동 장치를 통해 1층 뒷좌석이 무대와 수평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엄청난 조명 비용 때문에 실제 왕실 오페라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789년 10월 1일에 열린 경호원들의 연회는 5일 뒤 파리 시민들의 봉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 정원과 숲
베르사유성과 정원, 숲은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8600ha에 43km 둘레의 규모이다가 오늘 날은 800ha(성만 8,15㎦ : Louvre 243000㎥)로 줄어든 상태다.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대칭구조의 정원에는 4백 개가 넘는 조각품이 늘려 있고, 곳곳에 55개의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정원에 대단한 자부심을 보인 루이14세는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이라는 글을 남긴다. 성에서 정원까지 950미터. 길이 1670(폭62), 가로 1000(폭80) 미터의 대운하를 보면 지평선까지 3200미터에 이르는 전망이 무한대로 펼쳐진다. 숲 안에 프티 트리아농, 그랑 트리아농, 아모(시골 마을) 등이 자리잡고 있다.
대운하 공사는 11년(1668-1679)이 걸린다. 1674년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두 척의 곤돌라와 네 명의 곤돌라 뱃사공을 보낸다. 뱃사공들이 대운하의 들머리에 세운 건물에 거주하여서 그 이후로 이곳을 프티 브니즈(Petite Venise)라고 부른다.
특기할 만한 점들
1. 베르사유성의 면적 : 67121제곱미터. 700개의 아파트로 이루어짐.
2. 1682년 수도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공사 중. 1710년 성루이 성당이 준공되면서 50년간 공사 끝에 완공. 루이14세는 아주 세세한 설계까지도 직접 간여하여 수정.
3. 1678년부터 건축공사를 맡은 망사르가 두 개의 마굿간, 그랑 트리아농, 오랑주리(길이 150미터) 등을 새로 건축하면서 기존 성의 규모를 다섯 배로 늘린다.
4. 혁신적인 건축 : 백합, 태양, 수탉이 들어간 프랑스식 기둥머리 장식(르브랭)과 창문을 천장에서 바닥까지 꽉 들어차게 설치한 점.
5. 1752년 루이15세 시절에 왕의 아파트 입구로 쓰던 ‘대사들의 계단’이 허물어진다. 이 계단은 비너스의 방과 다이아나의 방으로 연결되었다. 그 이후로는 왕비의 계단이 입구로 쓰인다.
5. 루이14세 말기 베르사유성에는 4천명이 살았으며 하루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반면 성 바깥은 인구가 2700이었다. 낮 동안은 누구든 성을 방문하여 왕의 아파트를 지나가는 왕을 볼 수 있었고, 왕이 없을 때는 침실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만성절(11월1일)에서 부활절에 이르는 기간은 일주일에 3일은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왕의 아파트가 소수의 궁정인한테만 할애되었다. 이런 야회가 열리는 날은 간식, 음악, 무용, 놀이로 활기를 띠었다. 야회 때는 에티켓을 버리고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었다.
왕의 기상은 8시30분, 13시에 점심식사(petit couvert)
6. 일 년에 실내장식과 가구를 두 번 바꿈. 벽지는 겨울은 벨벳, 여름은 비단. 지금은 고정.
7.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즈의 16자녀 가운데 막내다.
8.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베르사유성의 가구를 경매하는데만 꼬박 일 년이 걸린다.
9. 물 공급 공사. 첫 번째는 여러 개의 인공 연못을 파서 표고차 이용, 이 경우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마를리(Marly)의 기계를 통해 센강(Bougival)의 물을 퍼올려 끌어오는 공사(1681), 운반 도중 손실이 많아 계산 대로 충분한 양의 물이 운반되지 않았다. 세 번째 강물(l’Eure)을 끌어들이는 운하건설(1685-1704) 계획은 전쟁(Ligue d’Augsbourg) 자금으로 돈이 우선 지출되면서 완성하지 못했다.
10. 9년 전쟁이라고도 하는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1688-1697)은 스트라스부르가 프랑스에 편입되는 걸로 끝난다.
11. 왕의 수석화가이며 회화 조각 아카데미의 학장, 왕가의 가구 제작 총 책임자이던 르브랭은 천장이나 벽면 아랫쪽의 대리석 장식, 정원의 분수대, 심지어 자물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설계를 도맡았다.
12. 회화 6천 점, 조각 3천 점.
13. 루이15세 초기 7년 동안(1715-1722) 왕실이 베르사유를 떠났다.
14. 1702년에 시작되어 1714년 라스타트(Rastadt) 평화조약으로 마무리되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루이14세는 기존의 프랑스 영토와 자신의 둘째 손자 앙주공작의 스페인 왕위는 가까스로 유지하지만 북아메리카에 개척한 식민지(la Terre-Neuve, l'Acadie, Hudson만)는 영국한테 넘겨주었다. 또한 1701년 이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누리던 상업적 특혜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일하러 간 베르사유성의 거울의 방. 30.07.17 저 끝에서 시작되는 왕비의 아파트는 아직 공사 중이다.
전쟁 갤러리의 들라크루아 그림 [성루이왕의 타이유부르 전투]. 33점의 전투화 가운데 단연 돋보인다. 이 정도를 척 알아보면 그림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된다.
전쟁갤러리 옆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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