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

원시 미술관에서

파샤 (pacha) 2016. 8. 16. 06:57

동안 예술품들이 루브르에 진짜 있는지 궁금했다. 여년 케브랑리(Quai Branly) 박물관이 문 열면서 주변 원시미술품을 싹쓸이해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긴 전에 루브르의 원시미술관을 가 보지 않았으니까 지금 규모와 예전 규모를 비교할 수는 없다. 어쨌든 현재 전시실엔 여점 정도가 선보이는데 정말 대단한 걸작품만 골라 놓았. 사실 케브랑리가 문 열 값진 소장품을 뺏긴 포르트 도레의 원시미술관과 샤이요 인류사 박물관은 출혈이 컸다. 포르토 도레의 원시미술관은 아예 간판을 내리고 이민역사 박물관으로 변신하였다. 샤이오의 인류사 박물관도 알맹이 소장품들을 내놓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예술품들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아니 멈추고  자리에 있다. 만든 이의 손을 떠나고 가진 자의 손도 떠났다. 더욱이 자신이 만들어진 고향에서 아주 멀리 유배 있다. 그래서인지 물건들은 시간의 자리 매김을 벗어나 영겁의 시간을 살고 있다. 만든 시기나 만든 지역을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예술 행위라고 생각지도 않고 정성과 혼을 다해 만든 사물이라고 보아야 하나, 아니면 권력자나 부자들의 치장과 과장을 위한 장식품이라고 해야 하나. 서양 문명의 시점에서 보면 분명 미개사회라고 보았을 지역들의 오브제들은 뭔지 모를 주술적인 매력이 풍긴다. 야릇한 흥분기를 불러일으킨다. 감동이라기 보다는 분명 감정의 동요다. 인간 본성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정. 이게 원시 미술이 갖는 매력이다. 형태의 단순함, 표현의 솔직함, 본능을 자극하는 소재. 이럴테면 성적인 본능, 두려움을 자극하는 표정, 모성애, 쾌활함... 나무로 만든 많다. 마무리도 거칠다. 만든 이의 사인은 아예 없다. 아이를 앉고 젖주는 엄마, 서로 마주하고 몸을 끌어 안은 남녀, 거대한 고추를 곶추 세운 남자, 온몸에 문신을 새기고 머리에 도가머리 깃털을 꽂고 눈을 부라리는 사제... 있는 사람, 앉은 사람, 추상화된 몸과 얼굴. 서양의 현대 조각은 원시미술에 빚진 크다. 자코메티의 조각이나 피카소의 조각을 보면 영락없다. 조각 아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얼굴 묘사는 아프리카의 마스크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신기하게도 이런 원시예술품은 현대에 가까와질수록 매력이 떨어진다. 19세기 이후로 제작된 작품을 보면 바로 느껴진다. 매끄러운 마무리와 세련된 기교가 더해질수록 본래의 원시적 건강성이 사라지고 문명의 때를 타기 시작한다. 서양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일까. 상업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래 나무로 된 남자는 파샤의 우간다 친구 조르주를 꼭 빼닮았다. 약간 꺼부정하고 깡 마른데다 얼굴 인상까지도...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나오는 입체파적 얼굴 묘사는 바로 이런 마스크에서 영향을 받은 게 틀림없다.








'루브르 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라바조, [점쟁이]  (0) 2017.01.15
영국 회화관에 가면   (0) 2017.01.15
사라진 유리 피라미드  (0) 2016.06.16
중세회화의 선명한 채색  (0) 2015.08.19
귀족 부부의 관  (0) 201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