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해
중세와 르네상스에 걸쳐 최악의 전염병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 때 전염병을 피해 모인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1349-1353)이다. 1348년 페스트가 피렌체를 습격했을 때 18세에서 28세에 이르는 일곱의 피렌체 여인들과 25세가 가장 어린 세 청년 모두 열 명이 피렌체를 벗어난다. 열흘 동안 한 사람이 열 편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나누는 100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데카메론]은 단편 소설(nouvelle) 장르의 모델이다. 이야기는 여러 유형의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야기를 쉬는 날이 있었으니 실제로 인공낙원에서 보낸 기간은 열흘이 넘는다. 2020년 1월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덮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자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화제의 작품이 되었다.
어쩌면 중세를 마감하는 결과를 가져온 페스트는 흑해 연안(크리미아 반도의 카파Caffa)에서 발생(1340)하여 이탈리아 상선을 통해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다. 제노아 항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에 마르세유항을 통해 프랑스에 전염병이 퍼저나간다.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까지 퍼졌으며 심지어 사하라 이남 지역까지 번졌다. 설치류, 특히 쥐에서 생긴 바이러스를 벼룩이 옮긴 것인데 원인을 몰라서 전염병이라기 보다는 '신의 재앙'으로 돌렸다. 이런 시각은 당시 지배층을 형성하던 카톨릭 세력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졌다. 이런 공포 앞에 사람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신뿐이었다. 성당은 속죄의 예배행렬과 성지순례를 조직화하기에 이른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가슴을 드러내고 채찍질하는 특정 수도회의 자학행위가 전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의사들도 사람과 사람을 통해 옮기는 게 아니라 의학적 근거없이 물과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 믿었다.
치료책으로 공기 오염된 지역을 피하고 목욕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어 애꿋은 속죄양도 만들어냈다. 바로 유태인과 신교도 박해였다. 그 뿐 아니었다. 거지며 외국인, 순례자나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이미 나병원에 유폐시킨 문둥병 환자들을 페스트를 옮긴다는 혐의로 경고도 없이 죽였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134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도시로 페스트가 번지기 전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물을 탔다고 뒤집어 씌워 발렌타인 데이인 2월 14일에 유태인 2천 명을 학살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집주인이 자신과 같은 건물에 세든 간호사를 내쫒는 일이 생겼고, 동성애자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원흉이라고 속죄양을 만드는 사건도 일어났다. 물론 그 전에 아시아인이 바이러스 전파자라고 지목되어 인종차별을 당한 사례는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미국, 호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어났다.
중세 페스트 때 남녀노소 빈부를 가리지 않고 전염되었다고 하지만 가장 가난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죽었다. 희한하게 어른 보다 어린 아이의 희생이 더 컸다. 이 점은 코로나바이러스와 정반대이다. 그때 프랑스 왕족이 페스트로 죽은 경우가 없다고 한다. 시체를 처리한다든지 물품을 운반한다든지 경제가 돌아가게 하는 최일선의 어려운 일은 다 하층민이 담당해서 이들이 전염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새 직업이 생겨나기도 한다. 바로 항구에서 하역하는 일이다. 극빈층이 짐부리는 일을 맡으면서 동시에 페스트 전염 여부를 가리는 생체실험물로도 이용되었다.
처음 격리(quarantaine)가 제도화된 것은 1377년 오늘날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였다. 정확한 원인을 모를 때는 감염자와 접촉을 피하는 게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해결책인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악수나 포옹이 사라지고 팔꿈치로 부딪히는 인사로 바뀌다가 1미터 이상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것마저 사라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머리로 우리식으로 인사하는 게 얼마나 현명한가!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사람들이 전염병을 피해 한적한 지방으로 도피하면서 전염병이 벽촌까지 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에서 3월 중순 격리가 시작되었을 전후 이미 조건이 되는 사람들은 수도권 지역을 피해 백사십만이 빠져나갔다고 하니… 고향의 부모집으로 가는 젊은이, 바캉스지에 세를 얻어 떠나는 사람, 별장으로 휴가 떠나듯 가는 사람…격리로 행동양식이 달라지고 있다. 부부가 따로 격리생활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끼리나 가까운 친척끼리 만나기 힘들고 연인들도 만나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다. 또 좁은 집에 많은 가족이 오밀조밀 갇혀 살면서 가정폭력이 몇 배가 늘었다고 한다. 양로시설이 격리되고 가족 면회가 금지되면서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 자식들이 양로원 바깥 먼발치에서 창문을 향해 고함치면 갇힌 노인네는 창문을 열고 손짓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 넘게 격리가 길어지자 이동 규칙을 어기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몰래 친구집을 찾아가 거리두기를 버리고 껴안으며 인사를 주고받고 마주보고 수다를 떠는가 하면 본능에 충실해 떨어진 남녀가 몰래 만나 정을 나누는 사례도 많아진다고 한다. 아무리 간접화 만남이 일상화되었다 해도 역시 인간관계는 얼굴을 마주하고 살과 살이 맞닿아야 정이 생기는 법인가!
세계적 대유행 전염병이 돌면 또 다른 걱정은 경제문제다. 전염병이 번진다고 모든 사람이 다 죽는 것은 아니니 산 사람은 또 먹고 살아야 한다. 중세 때 대흑사병으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들이 무역 중심지로서 입지가 줄어들고 대신 플랑드르 지방이 교역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다. 격리시행은 어마어마한 재정손실을 의미하고 나아가 정치적 혼란이 생길 수 있기에 페스트 퍼진 도시라고 발표할 때까지 심사숙고 할뿐 아니라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려고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현상까지 생긴다. 그 결과 페스트는 더 심하게 번져나갔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다 격리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서유럽 국가에서 실행하는 격리는 다음과 같다. 생존에 필요한 분야를 뺀 가게들을 폐쇄하고 각급 학교며 공연장, 영화관, 체육시설, 미술관 등을 닫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외출을 삼가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꼭 필요한 외출은 통행증명서를 들고나가야 한다. 격리의 여파는 너무나 뻔하다. 어쩔 수 없이 엄청난 실업자가 생겨나 세계경제가 마비 직전으로 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1929년 대공황보다 더 심한 경제공항이 올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 손으로 전염병을 막아내고 또 한 손으로는 경제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 지금 인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좇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각국마다 발표하는 통계가 의심스럽다는 지적이 많다. 대표주자는 물론 중국으로 진원지이면서 사망자 수가 예상 밖으로 적다. 어쨌거나 다 나라별로 사망자 수를 축소 발표하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의 경우 한 동안 양로시설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은 사람들을 통계에 넣지 않다가 얼마 전부터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매일 저녁 7시 30분에 지난 24시간 상황에 대한 통계 발표를 한다. 처음에는 병원에서 죽은 사람만 통계 발표를 했다. 그러다가 여론에 몰리자 어느 순간(4월 3일)부터 양로시설의 사망자를 포함시켜 발표하였다. 그런데 병원 사망자는 분명 숫자를 밝히면서 양로시설 사망자는 명시하지 않고 전체 사망자에 포함시킬 뿐 « 양로시설 사망자는 얼마다 »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뺄셈을 하면 바로 드러나는데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양로시설 사망자를 통계에 올리면서부터 하루 동안 노인들의 전체 사망자 수를 명시하지 않고 발표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심각한 분위기를 숨기려고 하는 의도에서 일까? 반면 이웃 나라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미국의 사망자 통계는 사망자 수를 강조하면서 보도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자기네들이 위기관리를 상대적으로 낫게 한다는 걸 주장하려는 듯 말이다.
중세의 페스트 때 경제 외교적 반대에 부딛혀 격리실시에서 나라간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논란이 생기면서 전염병은 훨씬 심각하게 번져나갔다. 발생 초기에 대응을 하지 못하고 다 퍼져서야 대책을 세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실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로 퍼져 심각하게 되자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여러 가지 의료장비를 중국에 의존하는 입장이면서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드러내놓고 중국을 코로나의 진원지로 책임을 묻는 판이다. 제대로 예측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이 번진 다음에야 각국 정부들은 부랴부랴 대책 세우기에 바쁘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경우 자체 마스크 생산이 절대 부족이라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처음 정부의 공식적인 의견은 환자가 아니면 마스크를 낄 필요가 없다고 발표했다. 실상은 의료진이나 꼭 껴야 하는 사람들한테도 마스크를 원할하게 지급하지 못하는 상태를 숨긴 것이다. 대규모 테스트가 필요없고 심각한 증세가 있는 사람만 검사하면 된다고 거듭 발표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많이 번져 프랑스 국회에서 감염자가 잇달아 나오던 때 이런 불평의 소리가 나왔지만 그냥 수그러들었다. « 왜 유명한 사람들은 금방 검사해서 입원시키고 보통 사람들은 검사를 하지 않죠? » 검사 장비와 인력이 부족한 것을 다 그런 식으로 숨겼다. 결국 국민을 상대로 국가가 거짓말한 게 들통이 났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정부측의 대책은 너무 허술했다. 바이러스가 프랑스 전역에 기승을 부리며 번지는 시점인 3월 15일 1차 시장선거를 강행해서 회복할 수 없는 좌충수를 두었다. 선거운동이나 투표과정에서 많이 노출된 시장후보나 선거참모들이 무더기로 감염되어 1차선거에서 당선됐지만 죽은 시장과 의원들이 여럿 나왔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한번 발표하면 20분을 넘기는 그 화려한 문학적 수사를 동원하여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이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썼다. 전쟁을 치르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마스크 뿐 아니라 방호복이며 여러가지 의료장비, 산소호홉기며 병실 모두가 부족했다. 얼마 전부터 마스크가 전염을 막는데 효과가 있다고 말을 바꿨다. 마크롱은 지난 세 번째 담화에서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음을 시인하고 « 5월 11일부터는 증세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검사를 하고 마스크도 충분히 공급합니다. »하고 발표했다. 사후약방문! 더 이상 거짓말을 숨길 수 없었으니… 심지어 마스크를 확보하기 위해 내무부가 부르고뉴 지방에서 주문한 마스크를 가로채고는 입을 잡아떼었다가 실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347년에 시작되어 1352년까지 지속된 페스트로 5년만에 유럽 인구의 30-50퍼센트가 죽는다. 정확한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통털어 2500만에서 4500만의 희생자를 낸다. 통계가 정확성이 떨어지겠지만 유럽에서만 2500만이 페스트로 희생이 된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만 10만이 죽는다. 이후로 거의 십 년마다 전염병이 도는데 원인 모를 병이면 다 페스트로 불렀다. 중세에만 적어도 네 차례 페스트가 창궐했다. 실제 프랑스에서 1347-1670 사이 페스트 환자가 없던 해는 한 해도 없었다. 극단적으로 페스트와 백년전쟁이 뒤얽혀 노르망디 지방은 인구의 70-80% 가량을 잃게 되었다. 그 결과 1400년대 인구는 1350년대에 훨씬 못미친다. 한 마을이 깡그리 사라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일손이 부족하고 먹여 살릴 식구가 줄어서 개간지가 버려지게 되면서 개발로 좁아든 숲이 자연상태를 회복하는 좋은 현상도 생겨났다. 며칠 전 파리 근교에서 격리로 오가는 사람이 없어 텅빈 시내를 사슴 두 마리가 유유히 다니는 동영상이 화제가 되었다.
한편으로 당시의 농업 생산량으로 부양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인구 조절 역할도 하지만 줄어든 인력을 감당하기 위해 기술 발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인력이 모자라 인건비가 치솟자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1351년 임금의 상한성을 정하는 법률안을 채택한다. 농업에서는 농작물 중심 재배에서 목축을 곁들이게 되었다. 책 제작의 경우 수도사들의 필사본에 의존하다가 활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손발로 베를 짜다가 직조기가 고안되어 적은 인력으로 생산량은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유럽에서는 노동집약적인 농업 사회에서 인구가 도시로 몰리고 카톨릭을 기반으로 한 중앙 권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놀랍게도 이런 엄청난 재앙에도 권력층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반면, 14세기 페스트의 여파로 몽고 세력이 쇠락하면서 중국에서 원나라가 망하고 명이 들어선다. 파트릭 부셔롱은 이렇게 결론내린다. 페스트를 겪고도 « 유럽에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습니다. 페스트의 공포에 휩싸였던 이 세계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그전과 다름없는 기틀에서 재출발합니다. » 그러면서 이 역사학자는 당시 아비뇽에 터를 잡았던 카톨릭 종교세력이 더욱 공고해진 사실을 지적한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건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들 전과 후가 다를 거라고는 하지만…
16세기 스페인 정복자가 퍼뜨린 천연두로 잉카 제국이 몰락한다. 1720년 페스트 때 프랑스 마르세유의 인구 절반이 줄어든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을 빨리 마감시킨 20세기 최악의 전염병인 스페인 독감으로 죽은 희생자는 3천만에서 5천만에 이른다. 극단적인 예로 바누아투(Vanuatu)족들의 섬 인구 90%가 희생된다. 또 20개에 달하는 언어가 사라진다. 이런 세기적인 전염병을 겪은 다음에도 인간들은 큰 반성이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 절대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 이런 여론이 지배적이었지만 20년 지나자 마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세계대전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세계 곳곳에서 국지전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21세기 들어와 생겼던 2003년의 사스(SARS)나 뒤이은 메르스(Mers), 조류독감 등을 치르고도 인간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전염병 뿐 아니다. 1990년대 말의 동아시아의 IMF나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신자유경제체제가 득세하여 만들어낸 세계화 결과 중국이 전세계 공장이 되다보니 마스크나 의약, 의료기기 생산 공장이 거의 없는 서구 선진국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앙지라고 탓하면서도 중국에 더욱 더 의존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 프랑스는 병원에서 양로시설에서 자신의 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초기 감염자들을 찾아내어 격리하는 신속한 대응책을 찾았어야 하는 시기를 놓치고 한참 뒤늦게 5월 11일부터 대규모 검사와 의심환자의 격리를 한다고 4월 19일에서야 발표했다. 이런 와중에도 누구는 평소보다 돈을 더 벌고 누구는 완전 실업자가 되고 누구는 굶어 죽어간다. 그래도 정치인은 경기후퇴며 재정적자 또 지지율에 더 신경을 곤두세운다.
매일 저녁 8시면 주민들이 창문을 열고 이 위기에 목숨걸고 일하는 사람들한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어떤이는 매일 정오에 무책임한 정권에 야유의 휘파람을 불자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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