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북쪽 40킬로 지점 큰 숲을 끼고 테브강(la Thève)이 감돌아 나가는 암반 위에 중세 시절 요새로 출발한다. 본격적인 건축은 16세기 중반 몽모랑시 원수 시절로 아직도 존재하는 작은 성(Petit château)을 완성한다. 다음 샹티이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을 만드는 가문은 콩데(Bourbon-Condé) 가문이다. 17-18세기의 걸쳐 프랑스식 정원을 설계하고(루이 14세 4촌 Grand Condé) 큰 마사(Grandes Ecuries)며 시골 마을(hameau)과 앙갱성(château d'Enghien)을 건축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감옥으로 쓰이다가 1799년에 성의 본채(Grand château)가 완전히 해체된다. 19세기 초 왕당파 군대를 조직해 혁명군에 대항하다 망명의 길을 떠난 루이조젭(Louis-Joseph) 콩데공이 나폴레옹이 물러가는 1815년에 돌아와 샹티이성을 복원하기 시작한다. 이때 영국식 정원이 설계된다. 루이조젭의 손자 앙갱공이 1804년 나폴레옹한테 총살 당하면서 후사가 끊기자 마지막 콩데공의 마지막 소유주(Louis VI Henri de Bourbon-Condé)가 루이필립의 다섯 번째 아들 앙리 도를레앙 오말공(Henri d'Oréans, duc d'Aumale)한테 성을 물려준다. 마지막 성주인 오말공 역시 망명에서 돌아와 성을 치장하고 복원하는데 온 정성을 쏟는다. 그랑 샤토를 복원하고 자신의 엄청난 수집품(그림, 책, 가구 등)을 전시한다. 역시 후사가 없던 오말공은 프랑스 학사원에 성과 수집품을 물려준다. 대신 두 가지 조건을 단다. 첫 번째 소장품은 자신이 전시한 대로 두고, 두 번째 소장품을 샹티이 바깥으로 빌려주지 않을 것.
왼쪽 앞으로 보이며 새지붕으로 보이는 것이 오래된 프티샤토이고 뒤로 빛바래보이는 쪽이 오말공 시절에 재건한 그랑샤토이다. 둘 다 르네상스풍 건축물.
정원쪽에서 본 성
안뜰에 자리잡은 멋진 분수
영국식 정원, 저 멀리 연못 뒤로 사랑의 정자가 보인다.
이길로 곧장 8백 미터쯤 가면 시골집이 나온다. 이 길 왼편으로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한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프랑스식 정원의 울타리를 만드는 철학자의 산책로
베르사유의 시골 마을의 원조인 아모로 가보자. 도랑물을 따라 참피나무 숲기를 따라 8백 미터쯤 가면 왼편으로 초가지붕에 골조가 벽바깥쪽으로 보이는 시골집이 나타난다.
샹티이에 가면 샹티이 크림을 먹어보아야 하는데 여기가 바로 샹티이 크림의 원산지이다. 오른쪽 본채가 주방으로 쓰리고 왼쪽벽 옆에 샹티이 크림을 만들 때 쓰였던 물레방아가 있다.
샹티이 크림을 만들던 물레방아
마침내 우리가 먹으려던 샹티이 크림이 나왔다. 왼쪽 컵의 음료수는 배로 만든 약한 도수의 술, 푸아레(poi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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